한국 선수로 타이완 리그에 진출했던 선수는 총 16명입니다. 윤경희(尹景熙), 김동호(金東鎬), 한희민(韓禧敏), 김형균(金炯均), 감병훈(甘炳勳), 박인구(朴仁球), 김종국(金鐘國), 유병선(劉炳宣), 이준(李俊), 최동진(崔東進), 김경태(金京泰), 김제빈(金齊斌), 김덕칠(金德七), 김대우(현 롯데자이언츠 외야수)가 선수로, 그리고 전 MBC 청룡과 롯데 자이언츠에서 원년부터 활약했던 김용운(金容雲) 씨와 *(update) 오비 베어스 스카우트 출신의 안계장(安啟漳) 전 휘문고 감독은 특이하게 코칭스태프로도 활약했습니다.
삼성 시절의 한희민/ⓒ삼성라이온즈 홈
타이완에 진출한 제 1호 한국 국적의 선수입니다. 통산 31게임에 나와 6승 16패 5.31의 방어율만을 기록하였습니다. 그 후에 한국으로 돌아와서 기아타이거즈의 투수 코치로도 활약했습니다. 이 한희민 선수는 당시 쥔구어 베어스가 20만 위안이라는 높은 급여를 주고 데려왔는데, 당시 쥔구어 베어스의 투수진이 약해 한희민 선수의 뒤를 받쳐줄 선수가 마땅치 않기에 자주 혼자서 경기를 책임져야 하는 등의 어려운 상황을 많이 겪으면서 고생했습니다. 그러면서 시작과 동시에 4연속 패(네 경기 평균자책점 10,23)를 하며 마음 고생을 많이 했었지요. 당시 나이가 이미 30대 중반으로 접어 들었고, 구속과 체력 등이 전성기만 못한 상황에서 뒤를 받쳐 줄 투수가 없다시피 한 상황에서 겪은 달갑지 않은 고통이었습니다.
김형균 선수의 모습/웨이라이 중계화면 캡쳐
감병훈 선수 파견 내용이 실린 매일신문 기사
안타를 치고 1루에 나간 박인구 선수/웨이라이 중계화면 캡쳐
김종국 선수 투구 모습/웨이라이 중계화면 캡쳐
유병선 선수의 홈런치기 전 모습/웨이라이 중계화면 캡쳐
김덕칠 선수의 투구 화면/웨이라이 중계화면 캡쳐
상대 타자의 헬멧을 맞추고 멋쩍게 웃는 김동호 투수/웨이라이 중계화면 캡쳐
대전 중도일보에 실린 윤경희 선수 기사내요입니다.
최동진 투수
김경태 투수

(청타이 코브라스 연습생 시절의 김대우)
광주일고 재학 시절 4번타자 겸 에이스로 이른바 ‘초고교급’ 선수로 명성을 날렸습니다만 계약금의 금액 차이로 연고 팀인 KIA의 1차 지명(기아 김진우 급의 대우를 받기 원했지만 기아 측에서는 김진우선수 급은 아니다라는 얘기가 있었다고 합니다.)을 받지 못하고 결국 롯데 자이언츠의 2차 지명 1순위로 지명 받았습니다. 그러나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둔데다 4억 5천만원을 제시한 롯데의 조건에 만족하지 못하고 고려대로 진학. 조건은 해외 진출 시 조건없이 자퇴할 수 있는 조항을 넣어 해외 진출에의 미련을 가졌었지요.
군 문제 해결을 위해 고려대 2학년 시절 상무에 입대하였고, 상무시절 선동렬놀이를 할만큼 뛰어난 성적(상무에서 스탯은 다승과 방어율 삼진, 그리고 승률까지 1위(방어울은 1점대 초반 ))이 뛰어났고, 그 후 병역을 마친 후 다시 메이저리그와 접촉을 하였으나 좋은 조건을 받으며 가고 싶었던 그의 바램과는 달리 만족스럽지 못한 조건에 실망하여 타이완 진출을 꾀하게 됩니다. 2007년 7월 타이완의 청타이 코브라스에 자비를 틀여서 테스트를 받아 합격 되었으나 원 지명권을 가진 롯데 구단의 반대로 KBO가 타이완으로 협조 공문을 보내오면서 CPBL에서 뛰는 꿈도 접고 귀국을 하였습니다. 당시 청타이 코브라스 팀은 김대우 선수를 정식 1군으로 등록 시키려 하였지만, CPBL에서 한국의 KBO와 마찰이 생기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타이완 리그에서 등판 불가의 선택을 내렸습니다.
(당시 계약상, 서류상의 문제로 결국 타이완 팀의 군 미필자 복무 팀과 같은 따이쉰 팀() 1에서 3게임만 등판 하였습니다.)
연도 | 소속 | G | Inn | W | L | H | S | 완투 | 완봉 | BB | K | E | 승률 | ERA |
---|---|---|---|---|---|---|---|---|---|---|---|---|---|---|
2007 | 따이쉰팀 | 3 | 10.1 | 0 | 1 | 0 | 0 | 0 | 0 | 0 | 9 | 2 | 0 | 1.742 |
통산 | 3 | 10.1 | 0 | 1 | 0 | 0 | 0 | 0 | 0 | 9 | 2 | 0 | 1.742 |
위 자료의 내용은 쥔구어 베어스가 한국 코치 안계장 씨를 수비코치로 임명했다는 뜻입니다. 이는 대만 프로야구 역사상 첫 번째로 한국인 코치가 진출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한국의 저명한 청소년팀 감독 출신으로 여러 차례 청소년대표팀의 코치를 담당했고 현재(당시) 휘문고 감독으로 재직 중이었다는 사실을 적고 있습니다. 여러 제자가 있는데 선동렬 등이 대표적이다.쥔구어 베어스가 그를 수비 코치로 임명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그의 야구 품격은 엄격한 훈련 집행 태도라서 선수들을 엄격하게 잘 지도하여 수비 및 피지컬 훈련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또, 한국을 잘 아는 그의 능력으로 다른 좋은 한국 선수들을 우리 팀으로 데려올 수 있는 면에서 그를 기용했다는 내용입니다. 당시 대만 연합뉴스에 실렸던 안계장 씨의 쥔구어 베어스 수비코치 계약 신문 내용으로 옛 자료의 DB를 캡쳐했습니다.
당시 타이완 야구계에 한국 야구선수들이 빈번하게 노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전에 1984년 실업팀 한국 화장품에서 투수생활을 하면서 최우수 투수상까지 받아쏙, 싱농 불스의 감독과 EDA 라이노스 감독으로 지내다 돌아가신 쉬셩밍(徐生明) 씨와 위에서 쓴 김용운 전 싱농불스 팀의 코치/ 감독 및 안계장 쥔구어 베어스 수비코치 때문이었습니다. 쉬셩밍씨가 한국에서 선수 생활을 한 덕분에 많은 선수들을 알게 되었고, 안계장 쥔구어 베어스 수비코치가 한국 출신 제 1호 선수였던 한희민 선수를 쥔구어 베어스(뒤에 1995년 당시 5억 2,700만 위엔(182억 원 정도)에 싱농 불스팀으로 매각하였습니다.)에 권유하여 대만에서 뛸 수 있었던 이유도 그런 그들이 있었던 덕분이었습니다.
한국에서 프로 1군 진입에 실패하거나 2군에서 퇴출 된 선수들 위주로 많이 타이완으로 건너가서 테스트를 받고 시작하였지만 그 결과는 크게 좋지 못했지요. 아무튼 지금은 그런 서로간의 교류조차도 없어진 현실입니다. 한국 야구가 타이완 야구보다 실력이나 시스템적으로 조금 더 발전을 한 이유도 있고,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여러가지 적응의 어려움도 있는 이유 등으로 양국간의 교류는 점차로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 타이완 프로야구 2군 따이쉰란뚜이(代訓藍隊)를 아시나요? http://chinesebaseballstory.tistory.com/124 타이완 야구선수의 병역 대체복무제도에 대한 설명. http://chinesebaseballstory.tistory.com/12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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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년도쯤 한희민 투수가 대만 준국베어스에 입단하면서 국내에서 대만프로야구에 대한 관심을 끌었었죠.OB출신 김형균 투수도 같은팀에서 활약했었죠. 이때가 대만프로야구 최고 전성기때였는데 말입니다.
언더핸드 김덕칠 투수는 대만에서 가장 성공한 한국선수이고,
윤경희 투수는 윤경영으로 개명해 현재 한화에서 뛰고있죠.
롯데출신 김제빈 투수는 김덕칠 투수 이후 7년만에 대만리그에서 승리를 올렸던 투수였죠.
일본선수도 대만에서 성공한 선수가 꽤 되는데 올시즌엔 흥농 불스의 좌완 쇼다 이스키 투수가 다승, 탈삼진 2관왕을 차지했죠.
이츠키선수나 고바야시나 일본 선수들은 성공케이스가 좀 많은 편이지요. 윤경영선수 이야기는 처음 듣네요...개명을 했군요...
정성스런 글, 잘 읽었습니다.
대만야구가 한국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아서 모르는 분들이 많았을텐데...
이렇게 잘 정리해 주셔서 좋은 정보 얻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모두 대만에서 개쳐발렸네 ㅋㅋㅋㅋ
김동호 선수는 1997년 해태에 입단한 대졸신입투수 아닌가요.이 선수는 1973년 출생입니다.당시 스포츠 서울 기사에서 해태의 대만 전지훈련에서 147km의 강속구로 인해 기사를 올려 준적이 있습니다.당시 12승 신인왕을 노린다.김동호라고 나왔죠.
이 투수가 교통사고로 야구를 그만둔 비운의 투수 박철웅과 함께 엘지로 트레이드 되었습니다.
당시 둘이 합려 10승급 투수로 불렸죠,
네.확인한 결과 1973년생이 맞네요. 영흥고-계명대 출신까지 찾았습니다.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대우!본인은
사실롯데팀을
별로안좋아하는데
도대체롯데구단이
무슨목적으로
김대우의대만진출을
막으려드냐!
자기연고지선수도
아닌데남의앞길을
막을자격이있냐!
대체무슨근거로
비열한돈벌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