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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야구 이야기/대만 야구선수들

[기획시리즈]대만의 야구선수들 (1) 왕지엔민(王建民)

안녕하십니까? 중국과 대만야구 전문 블로그인 Chines Baseball Story에서는 '대만의 야구선수들' 이라는 기획 기사를 준비하였습니다. 대만 출신으로 MLB, NPB 등의 해외 리그와 자국 CPBL 에서 뛰고 있는 주목할만한 선수를 기획하여서 한 사람씩 소개하는 코너를 새로 만들었는데 그간의 의견을 종합하여 만들었습니다.
(제가 생각한 선수도 물론이지만 대만 야구에 관해 궁금하신 선수가 있으면 알려 달라고 의견을 내주시는 독자 참여에 오른 
왕지엔민(王建民), 천진펑(陳金峰), 궈홍즈(郭泓志), 후진롱(胡金龍), 펑정민(彭政閔), 장지엔밍(姜建銘), 차오진후이(曹錦輝), 린웨이주(林威助), 쟝타이산(張泰山), 천용지(陳鏞基), 장쯔지아(張誌家), 린커지엔(林克謙), 뤼밍츠(呂明賜), 궈리지엔푸(郭李建夫) 순 입니다.

현재 우리가 잘 모르던 예전에 활약하던 선수들도 있고, 잘 알려진 메이져리거들도 있습니다.그동안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아서 이름등이 아무렇게나 마구잡이로 불려지던 대만의 야구선수들에 대하여 소개하는 기획을 시리즈로 준비하였습니다. 그들의 정확한 이름과 어떤 선수인지, 또는 어떤 배경과 어떤 실력을 가지고 있는 선수인지 궁금한 점들을 이번 기획을 통하여 자세하게 여러분들께 소개하려 합니다.

원어 표기는 외국의 국호나 지명, 인명의 표기에 관한 지침을 참고하여 여기서의 표기는 전부 중국어의 원음을 그대로 읽는 것을 한글로 표기할 예정입니다. 그 표기만 따라 읽어도 자연스럽게 중국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발음이 되는 것입니다.(왜 한국어 한자로 읽으면 안되냐고 물으신다고 해도 ^^ 그건 제가 중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입장이라서 이기도 합니다. 현재의 신문 등에서 쓰이는 외국어 표기법과는 약간 다를 수 있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첫 번째로 야구를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유명한 대만 출신의 야구 선수이자 현 메이져리거인 왕지엔민(王建民) 현 뉴욕 양키즈 1군 선발 투수부터 소개하려 합니다.

왕지엔민 투구모습/사진제공 anrules


왕지엔민(王建民). '왕쳉밍', 왕젠밍', '왕첸밍' 등 중구난방으로 아무렇게나 읽혀졌던 선수입니다. 대만어의 여권에 알파벳처럼 쓴 표기법을 그대로 읽은 것인데요, 그 표기법은 영어가 아니기에 그대로 읽으면 발음이 달라지고 그렇게 되면 전혀 다른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지엔민(이하 한자병기없이 이름만 나열)'이라고 읽는 것이 가장 정확한 발음입니다. 이 문제는 앞으로도 수많은 선수들이 소개될 때도 똑같이 표기하겠습니다.

이 선수는 1980년 3월 31일생이고 신체조건은 193cm, 102kg입니다. 우투우타에 최고 구속은 155km(2004년 마이너리거 일때;항간에 99마일까지 나왔다고 전해졌는데 팬심의 발로인듯...)까지 찍은 적이 있다고 합니다. 대만의 타이난시(臺南市)에서 태어난 왕지엔민은 타이베이 체대를 거쳐 2000년 6월 5일 뉴욕 양키즈팀과 자유 계약 신분으로 계약을 하여 진출합니다. 당시 계약금은 201만 달러(계약금 190만 달러+특별장학금 10만 달러+본가 지원금 1만달러)로 계약을 하여 미국으로 진출하였고, 현재 연봉 500만 달러로 작년 말에 연봉조정협상에서 올 시즌 연봉을 1년 계약 했습니다.

결혼식 당시의 사진

왕지엔민의 첫사랑이라고 알려진 우지아링(吳嘉姈)과 4년의 연애 후에 2003년 12월 7일에 결혼하였습니다.

올해(2009년) 6월에 아빠가 됩니다. 여권에는 'Chien-Ming Wang'이라고 적혀 있어서 한국의 신문 기자들이 '왕치엔밍'이라고 부르지만 정확한 발음은 '왕지엔민'입니다.







이 선수의 대만 대표경력은 아래와 같습니다.


1991년 제 9회 IBA 소년 연식야구 월드컵 대표

1997년 제17회 아시아 청소년야구 선수권대회 대표
1999년 제 8회 네덜란드항배 야구대회 대만 대표
2000년 대양배 4개국 5강전 대만 대표
2002년 제14회 부산 아시안게임 대만 대표
2003년 제23회 아시아 야구월드컵 대만 대표
2004년 제28회 아테네 올림픽 대만 대표
2005년이후 메이저에 올라 구단불허로 대표참가못함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 대만 대 일본: 왕지엔민의 투구>

약 6년 간의 마이너 생활을 거쳐 2005년 처음으로 메이져리그로 올라간 왕지엔민은 많은 기록을 세우고 대만의 야구 영웅이자 최고 스타로 자리매김을 하게 됩니다. 그가 19승을 올리며 활약한 해에 세운 기록은 아래와 같습니다.

아시안 투수로는 최다승인 19승(박찬호가 18승이죠.)을 올렸고, 땅볼 유도의 수가 407개로 메이져리그 1위에 올랐고, 병살 유도는 메이져리그 2위인 33개. 피홈런갯수는 12개로 150이닝 이상 던진 투수들 가운데 가장 낮은 비율입니다. 76%의 승률로 당시 메이져리그 3위를 기록하였고, MOM은 15회에 선정되었으며, MVP투표에서 33명 중 6명의 투수 가운데 한 명으로 뽑혔는데, 실제 투표에서는 겨우 2점 만 얻는데 그쳤습니다. 그러나 TYIB(This Year in Baseball Award)에서 당당 최고의 선발투수로 꼽히면서 수상을 했었지요.

 
<뉴욕 양키즈에서의 영상들:유튜브>

아무튼 왕지엔민선수는 대만 역사상 가장 유명한 선수로서 그 유명을 떨쳤는데요, 어린 시절에 야구보다는 농구를 좋아했고 그래서 학교(총슈에 초등학교.崇學國小)농구부에 들었는데 당시 야구부와 농구부를 겸임하던 선생님에 의하여 야구를 시작하였습니다. 자질을 알아본 선생님은 바로 투수 훈련을 시켜서 투수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지엔싱중학교(建興國中)에서 쟝시지에(張錫杰)코치를 만나 대성 을 하였습니다. 이 시기에는 여러가지 기초를 닦고 기술을 연마한 시기였는데 당시 같은 연배로 활동하던 선배들은 궈홍즈(郭泓志), 후진롱(胡金龍), 뤄진롱(羅錦龍) 등이 있는데 후에 모두 미국으로 진출하여 같은 길을 가게되죠. 

고등학교 시절에는 전통의 '롱공 야구단(榮工棒球)'에 가입하여 활동을 하였습니다. 이미 신체적으로 키는 190cm으로 커졌고, 몸무게도 90kg으로 장성하여 건장한 체격으로 자라났죠. 청소년야구 시절 150km 에 육박하는 강속구와 건장한 신체 조건을 갖추고 여러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면서 해외 스카우터 등의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1997년
롱공 야구팀 소속으로 전국 야구선수권 대회에서 우승(당시 상대 팀과의 경기 중에 심판의 존에 불만을 품고 양 팀의 응원단들이 폭력적으로 난동이 있었지만 왕지엔민은 태연하게 마운드에서 흔들리지 않았다고 합니다.)함으로서 캐나다에서 열렸던 IBA 세계 청소년 야구 선수권 대회에 대만 대표로 나가게 됩니다. 그 때에 여러가지 수속 등을 편하게 하기 위하여 호적지를 타이난(台南)에서 타이베이(台北)로 옮기던 와중에 왕지엔민은 지금의 부모가 낳은 친자가 아니고 자신이 양자로 입적된 사실이 밝혀진 일이 있습니다. 원래는 세째 삼촌의 아들이었는데 지금의 아버지가 아들이 없어서 대가 끊길 것을 걱정하여 왕지엔민을 양자로 입적하게 된 사실이 밝혀졌던 것이죠.

왕지엔민을 포함한 다양한 버블헤드인형


이 일로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고 방황을 하여 잠시 야구를 그만 두었던 적이 있는데, 결국 이 일은 나중에 대만의 집요한 언론들에 의하여 밝혀지면서 왕지엔민과 대만의 언론들과의 사이가 극도로 나빠 졌습니다. 아무튼 코치의 설득으로 방황을 끝내고 다시 야구를 시작한 왕지엔민은 타이베이 체육대학(台北體院)에 진학을 하여 80년대 초반 일본 난카이 호크스에서 야구생활을 하였던 코치 가오잉지에(高英傑)의 지도를 받습니다.

그의 1년 선배이자 당시 포크볼의 왕자로 불렸던 차이중난(蔡仲南:싱농 불즈에서 활약)으로부터 포크볼과 코치로부터 싱커를 배웠고, 싱커를 잘 갈고 닦아 잘 연마하여 저신의 주무기로 삼았습니다. 본격적으로 왕지엔민이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은 계기가 된 것은 2000년의 대양배 4개국 5강(대만 두 팀) 초청대회(大揚盃四國五強成棒邀請賽)에서였습니다.


호주와 일본, 한국, 그리고 대만의 두 팀이 참가한 이 대회에서 왕지엔민은 151km의 강속구와 적절한 변화구를 잘 섞어 던지면서 많은 활약을 하여 국제 스카우터들로 주목을 받게 되었고 그 대회를 계기로 대만의 프로팀 싱농불즈 뿐만 아니라 일본의 쥬니치와 미국의 시애틀 매리너스, 보스톤 레드삭스, 아틀란타 브레이브스, LA 다저스, 뉴욕 양키즈, CA 에인절스, 콜로라도 록키즈, 아리조나 디벡스 구단 등에서 경쟁적이고 매우 적극적으로 계약을 추진하게 됩니다. 일단 신체적인 조건이 아주 좋았고, 강견에 컨트롤도 안정적이면서 어깨를 잘 보존하였던 것이 좋은 점수를 받아 많은 구단에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메이져리그 구단들이 경쟁적으로 스카우트전에 뛰어들게 되면서 계약금도 올라갔지요.

아무튼 원래 아틀란타 브레이브스에서 양키즈보다 많은 돈(230만 달러)을 불렀지만 왕지엔민의 어릴적 우상(Roger Clemens)있는 뉴욕 양키즈 팀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리고 에이전트와 당시 협회국 사람들도 양키즈와의 계약을 최우선으로 하고 나머지 팀들을 생각하는 원칙을 세웠다고 합니다. 아무튼 그런 덕분에 2000년 5월 6일에 뉴욕 양키즈 구단과 201만 달러의 정식 계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왕지엔민 선수가 박찬호 선수보다 많은 계약금을 받게 된 것은 그만큼 관찰하던 스카우터 들이 많았기도 하였고 많은 구단이 경쟁이 되어서 그렇습니다.(당시의 대만 시장에서 많은 수의 메이져리그 스카우터들이 유망주를 발견하기위해 활동을 하였던 영향도 있다고 봅니다.)

아무튼 군대를 미필한 왕지엔민은 일반적 방법으로는 외국을 진출할 수 없었지만 우수한 학생신분으로 국위선양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어 결국 미국 유학생 신분이 되어 진출하게 되지요.

그 후 마이너에서 각고의 노력을 하였기도 했지만 부상 등의 여파로 결국 6년 만에 메이져리그에 올라가게 됩니다. 2005년 4월 30일에 양키즈 홈경기에서 토론토 블루제이스팀을 상대로 첫 등판을 합니다. 대만 야구인 사상 뉴욕 양키즈 소속으로는 처음 등판하게 되는 것이지요.

대만 선수 출신으로는 제 3호 메이져리거가 된 것입니다.[(제 1호는 천진펑(陳金鋒), 2호는 차오진후이(曹錦輝)선수입니다.] 그러나 그 해에 양키즈가 플레이 오프 시리즈에 나가면서 결국 디비전 시리즈에 나가게 되었고, 대만 출신으로는 첫 번째로 디비전 시리즈 등판의 영광을 차지 하였습니다. 

아무튼 인상 깊은 활약을 보였던 왕지엔민은 2006년 싱킹 패스트볼(Sinking Fastball)과 싱커, 포크볼 등을 주무기로 양키즈 선발진의 한축을 담당하여 땅볼 유도의 제왕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그 해의 성적은 19승 6패로 미네소타 트윈즈의 요한 산타나와 함께 최다승 투수로 등극을 하였습니다.(박찬호의 아시아 선수 최다승 기록인 18승을 깬 것으로 더 잘 알려졌습니다.) 그 후 플레이오프 시리즈에서 디트로이트 타이거즈를 상대로 첫 승으로 거두기도 했었습니다.

왕지엔민의 MLB 통산기록 / NY홈페이지

 
2007년에도 19승 7패로 에이스급으로 컸지만 2008년에 부상 등으로 개막전 선발에서 빠졌고, 회복 후에는 2연패에 빠지기도 하는 등의 부진을 겪었으나 그 해 5월 타임지의 2007년 전세계 100인의 영향 인물에 선정되기도 하였습니다. 2007년 연봉조정 협상에서 400만 달러로 조정을 받았고 작년에는 다시 500만 달러의 연봉 조정 협상을 가졌습니다. 올해야말로 고액 장기계약을 위해 어느 해보다 좋은 성적을 올리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죠. 길고 긴 부상의 터널에서 회복되어 다시 얼마만큼 활약을 보여줄 지 기대되는 선수입니다.

자료는 타이완 위키, 타이완 야후, 타이완 구글, 왕지엔민 팬페이지(www.chien-ming.com), 그리고 뉴욕 양키즈 홈페이지 등에서 찾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