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완 리그에 진출했던 한국 국적의 야구 선수들(총 16명)

*예전에 올렸던 기사인데 내용이 수정되었거나, 새로운 소식과 이미지가 올라와서 갱신합니다.

한국 선수로 타이완 리그에 진출했던 선수는 총 16명입니다. 윤경희(尹景熙), 김동호(金東鎬), 한희민(韓禧敏), 김형균(金炯均), 감병훈(甘炳勳), 박인구(朴仁球), 김종국(金鐘國), 유병선(劉炳宣), 이준(李俊), 최동진(崔東進), 김경태(金京泰), 김제빈(金齊斌), 김덕칠(金德七), 김대우(현 롯데자이언츠 외야수)가 선수로, 그리고 전 MBC 청룡과 롯데 자이언츠에서 원년부터 활약했던  김용운(金容雲) 씨와 *(update) 오비 베어스 스카우트 출신의 안계장(安啟漳) 전 휘문고 감독은 특이하게 코칭스태프로도 활약했습니다. 
 

삼성 시절의 한희민/ⓒ삼성라이온즈 홈 

거의 대부분의 선수들은 한국에서나 타이완에서도 별다른 성적을 올리지 못하였습니다만 유일하게 한희민 선수와 김덕칠 선수, 

그리고 김용운 선수(전 싱농불스 코치/감독 출신)는 유일하게 감독까지 한 사람이라서 주목했습니다.



한희민(韓禧敏) : 1962년생으로 빙그레 이글스 소속(1986년~1992년)의 스타 투수였지요. 그 후에 삼성 라이온즈(1993년)를 거쳐서 타이완의 쥔구어 베어즈(俊國熊隊 : 1994년~1995년)에서 활약했습니다. 한국에서 통산 80승을 거둔 스타선수였지만 노쇠화되어 더이상 한국에서는 선수로 뛰기 힘들기에 그  선수 생활을 계속하기 위하여 타이완으로 진출한 케이스입니다. 

타이완에 진출한 제 1호 한국 국적의 선수입니다. 통산 31게임에 나와 6승 16패 5.31의 방어율만을 기록하였습니다. 그 후에 한국으로 돌아와서 기아타이거즈의 투수 코치로도 활약했습니다.  이 한희민 선수는 당시 쥔구어 베어스가 20만 위안이라는 높은 급여를 주고 데려왔는데, 당시 쥔구어 베어스의 투수진이 약해 한희민 선수의 뒤를 받쳐줄 선수가 마땅치 않기에 자주 혼자서 경기를 책임져야 하는 등의 어려운 상황을 많이 겪으면서 고생했습니다. 그러면서 시작과 동시에 4연속 패(네 경기 평균자책점 10,23)를 하며 마음 고생을 많이 했었지요. 당시 나이가 이미 30대 중반으로 접어 들었고, 구속과 체력 등이 전성기만 못한 상황에서 뒤를 받쳐 줄 투수가 없다시피 한 상황에서 겪은 달갑지 않은 고통이었습니다.

진출 첫해 22게임에 출전(20게임 선발)하여 122.1이닝을 던져 134피안타(22피홈런)을 맞았고, 성적은 5승 10패 5.66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습니다.  두 번째 해에 결국 연봉 삭감이 되었고, 리그 초반에 슝디 엘리펀츠와 경기에서 타자가 친 타구가 발에 맞는 부상을 당하여 계속 부진하면서 다시 5연패를 하는 등의 결과로 결국 그해 상반기 리그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서 부상 치료를 하던 중에 쥔구어 베어스가 팀을 싱농 불스에 매각하는 바람에 그대로 대만에서의 생활이 끝났던 것입니다.



김형균(金炯均) : 1969년생으로 한국의 OB베어즈에서 3년(1989년~1991년)간 뛰다가 타이완으로 와서 쥔구어 베어스(俊國熊隊)에서 2년동안 뛰었습니다. 쥔구어 베어스에서 주로 중계나 구원 투수로 활동했습니다. 그래서 승패와는 크게 연관이 없는 듯하다가 첫 해 6월 4일에 처음으로 통이 라이온스(당시 선발 맞대결은 통이의 궈진싱郭進興 투수)를 상대로 선발 출장을 하여 2:1로 무사사구 완투승을 하면서 첫 승리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첫 해 총 21게임에 나와 58이닝 동안 1승 3패 2세이브를 기록하였고, 다음 해에는 겨우 한 게임만 나왔습니다.

김형균 선수의 모습/웨이라이 중계화면 캡쳐


감병훈(甘炳勳) : 1971년생으로 1994년 경북고-단국대 출신 좌투수로 삼성 라이온즈와 1차지명으로 계약한 후 삼성이 1년간 실전 훈련 차 대만으로 파견했다고 합니다. 타이완의 쥔구어 베어스(俊國熊隊)로 와서 1년간 경험하다 다시 삼성으로 건너간 케이스입니다. 쥔구어 베어스에서의 성적은 그리 좋지 못했습니다. 중계로 첫 등판에서 2이닝동안 4실점을 하며 패전 투수가 되었습니다. 네 경기에 출장하여 세 경기를 선발로 나왔는데 18.1이닝을 던져 승리없이 2패, 평균자책점 6.87만 기록하며 물러났습니다. 이후 삼성에서도 큰 활약없이 총 6년간(1994년~1999년) 30경기만 출장하여 승리없이 2패만 기록했습니다. 

감병훈 선수 파견 내용이 실린 매일신문 기사


당시 1차지명의 동기로는 유지현, 유택현, 최상덕 선수였지요. 현재는 감병훈 연탄구이 전문점으로 범어동에서 고깃집을 하고 있으면서 사회인야구 선수로 활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쥔구어 베어스 시절 감병훈 투수의 모습/웨이라이 중계화면 캡쳐


박인구(朴仁球)  : 1970년생 좌타 외야수로 경주고 출신의 야구 선수로서 한국의 삼성 라이온즈에서 선수 생활을 3년간(1990년~1993년) 하였습니다. 그 후에 삼성의 자매결연 팀인 쥔구어 베어스(俊國熊隊)에 1994년에 와서 1년간 뛰었습니다. 외야수 요원으로 주로 좌익수로 활약했는데 타이완에서의 성적은 겨우 타율 1할 2푼 대의 빈타였습니다.

안타를 치고 1루에 나간 박인구 선수/웨이라이 중계화면 캡쳐


김종국(金鐘國) : 1972년생 투수로 1994년 삼성 라이온즈 소속으로 되었지만 바로 퇴출당하고 타이완의 쥔구어 베어스(俊國熊隊)로 온 케이스입니다만 여기서도 성적부진으로 7게임에서 20.2이닝동안 방어율 6점대에 단 4패 만을 기록하며 집으로 가는 짐을 싸게 되었습니다. 

첫 경기는 슝디 엘리펀츠를 상대로 선발 출장하여 5이닝까지 4:2로 앞서며 승리의 기회를 가졌는데 6회에 동점이 되면서 승리가 날아갔고 총 8.1이닝을 던졌으나 결국 패전투수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선발 기회에서도 스바오 이글스를 상대로 5회까지 5:2로 앞서며 첫 승리를 기대했지만 6회 들어 홈런을 맞으며 교체되었고, 그 이닝에서 스바오 이글스가 무려 10점을 뽑으면서 또 패전 투수가 되는 등 모두 4패 만을 기록했습니다.

김종국 선수 투구 모습/웨이라이 중계화면 캡쳐


유병선(劉炳宣) : 1963년생으로 타이완에서 뛴 최초의 한국인 포수 자원이었습니다. 포항제철 야구팀 소속으로 삼성라이온즈에서 1986년 지명권 포기를 함으로서 선수생활을 계속하려고 1995년 타이완의 쥔구어 베어스(俊國熊隊)에서 잠시 뛰었지만 성적부진(5게임 18타수에서 1할1푼)으로 퇴출된 케이스입니다. 그러나 유병선 선수는 대만프로리그에서 산상 타이거즈 팀과의 경기에서 홈런을 치며 한국 선수로 유일하게 홈런을 친 기록의 타자가 되었습니다.

유병선 선수의 홈런치기 전 모습/웨이라이 중계화면 캡쳐



김덕칠(金德七) : 1970년생으로 한국전력 야구팀 선수로 있다가 타이완으로 건너 온 케이스입니다. 타이완에서는 웨이취엔 드레곤즈(1999년)에서 16게임 46이닝을 던져 4승 1패 2세이브 3.13의 방어율을 기록하였습니다. 그 후에 T.M.L의 니엔다이띠엔공(年代雷公) 팀(2000년)에서 30게임동안 138이닝을 던져 9승 6패 4.17의 방어율을 기록하며 활약했습니다. 

또한 타이완에서는 처음으로 한국 국적의 선수가 타이완 챔피언 시리즈에 등판하였던 제1호 선수입니다. 챔피언시리즈 첫 경기에서 2이닝을 중계로 나와 던졌습니다. 그리고 3차전에서는 선발로 나와 6.1이닝을 던지면서 천롄홍에게 투런 홈런을 맞은 것외에는 좋은 투구 모습을보이며 승리를 따냈습니다. 이것으로 한국 선수로는 최초로 챔피언시리즈 승리투수가 된 기록과 첫 우승을 경험한 선수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故쉬셩밍 감독의 한국 인맥으로 대만에 진출한 케이스라고 합니다. 리그 도중에 웨이취엔으로 진출하였고, 선발과 중계, 마무리까지 고루 돌아가면서 맡았습니다. 

현재는 김덕칠에서 '김도윤? 김도현? '이라는 이름으로 개명을 했다고 합니다. 타이완에 진출한 한국 선수들 중에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였던 선수이기도 합니다. 

김덕칠 선수의 투구 화면/웨이라이 중계화면 캡쳐



김동호(金東鎬) : 1973년생으로 1995년 해태 1차 지명된 뒤 97년에 입단한 선수이다. 목포 영흥고와 계명대를 졸업하고, 현대전자 실업팀을 거쳐 해태에 입단한 투수로 해태타이거즈(1997년) - LG트윈스(1998~2002년)에 있다가 후에 타이완의 T.M.L 띠이진깡(第一金剛)팀(2003년)으로 왔습니다. 성적은 6게임에 나와 25와 3/1이닝을 던져 4.90의 방어율로 3패만을 기록하였습니다.

당시 상대팀 선발로 나온 현 타이완의 대표 투수인 판웨이룬이 띠이진깡 첫 타자에게 헬멧에 맞는 볼을 던져 당시 규정으로 퇴장을 당한 후에 띠이진깡 팀이 다섯 점을 뽑으면서 김동호 선수가 5이닝동안 잘만 막으면 승리투수가 될 수 있었습니다만 본인도 상대 타자의 헬멧을 맞추면서 퇴장을 당하는 헤프닝이 있었습니다. 그 경기는 팀이 대승을 거뒀지만 김동호 선수는 5회가 되기 전에 내려갔기에 승리투수가 되지 못했던 아쉬움이 있습니다. 아무튼, 김동호 선수는 팀의 수비가 엉망인지라 그 후에도 계속 수비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서 안타깝게 대만을 떠나야 했습니다.

상대 타자의 헬멧을 맞추고 멋쩍게 웃는 김동호 투수/웨이라이 중계화면 캡쳐



윤경희(尹景熙) : 1980년생으로 前 통이라이온즈 소속의 겅지엔후이(耿健輝)씨의 소개로 타이완의 띠이진깡(第一金剛)팀으로 왔습니다. 성적은 모두 7게임 24와 3/1이닝동안 4.07의 방어율에 1패만을 기록하였습니다.(새로운 정보는 현재 개명을 하여 '윤경영'이라는 이름으로 한화에 신고선수로 입단하여 2010년에 방출되었다고 합니다.) 

대전 중도일보에 실린 윤경희 선수 기사내요입니다.



김제빈(金齊斌) : 1982년생으로 한국 롯데 자이언츠의 2차 5순위에 지명된 선수로 2002년 한 해동안 롯데(2군)에서 뛰었고, 그 후 2007년 4월에 테스트를 받고 타이완의 청타이 코브라스로 왔습니다. 타이완에서는 7게임 27.2이닝에 나와서 2승3패 5.20의 방어율을 기록한 후에 성적부진으로 그 해 5월28일 계약해지되었습니다.


이준(李俊) : 1977년생 좌완 투수로 2003년 삼성 라이온즈에서 1년간 적을 두고있다 2004년에 중신 웨일즈(中信鯨隊)로 건너온 케이스입니다. 역시나 당시 중신팀의 감독이던 쉬셩밍 감독의 인맥으로 타이완으로 건너왔습니다만 성적 부진으로 계약해지된 후 타이완을 떠나서 2005년 중국의 지앙쑤 호프스타즈(江蘇希望之星) 팀에 들어간 케이스입니다. 타이완에서 첫 게임 등판 시 130km가 안 되는 구속과 계속된 폭투에 가까운 공을 던져 바로 강판된 후에 단 두 게임 1.1이닝 외에는 다시는 출장하지 못했습니다. 2004년 이준 선수를 끝으로 더 이상 타이완 프로리그에 진출한 한국 선수는 없었습니다. 



최동진(崔東進) : 1976년생으로 부천고-한양대 출신의 청소년 대표 출신 강속구 투수였습니다. 그 후에 현대 유니콘스의 투수로 잠시 활약하기도 하였습니다. 2003년에 T.M.L 청타이 타이양(誠泰太陽隊) 팀에서 단 한 게임에 선발로 나와서 방어율 9.0을 기록하며 부진하자 팀은 바로 성적부진을 이유로 계약해지를 하여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최동진 투수



김경태(金京泰) : 1975년생으로 먼저 LG 트윈스(1998년~2001년)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후에 두산베어즈(2002년~2003년)로 옮겼다가 다시 타이완의 청타이 타이양(誠泰太陽隊) 팀(2003년)으로 와서 1년간 활약하다가 다시 SK 와이번스(2004년~2008년)로 와서 후에 다시 LG 트윈즈(2009년~)로 옮겼던 파란만장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 선수입니다.

김경태 투수



김대우 1984년 7월 26일생으로, 190cm/95kg의 당당한 체격 조건으로 우투우타의 투수입니다. 

     (청타이 코브라스 연습생 시절의 김대우)
광주일고 재학 시절 4번타자 겸 에이스로 이른바 ‘초고교급’ 선수로 명성을 날렸습니다만 계약금의 금액 차이로 연고 팀인 KIA의 1차 지명(기아 김진우 급의 대우를 받기 원했지만 기아 측에서는 김진우선수 급은 아니다라는 얘기가 있었다고 합니다.)을 받지 못하고 결국 롯데 자이언츠의 2차 지명 1순위로 지명 받았습니다. 그러나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둔데다 4억 5천만원을 제시한 롯데의 조건에 만족하지 못하고 고려대로 진학. 조건은 해외 진출 시 조건없이 자퇴할 수 있는 조항을 넣어 해외 진출에의 미련을 가졌었지요. 

군 문제 해결을 위해 고려대 2학년 시절 상무에 입대하였고, 상무시절 선동렬놀이를 할만큼 뛰어난 성적(상무에서 스탯은 다승과 방어율  삼진, 그리고 승률까지 1위(방어울은 1점대 초반 ))이 뛰어났고, 그 후 병역을 마친 후 다시 메이저리그와 접촉을 하였으나 좋은 조건을 받으며 가고 싶었던 그의 바램과는 달리 만족스럽지 못한 조건에 실망하여 타이완 진출을 꾀하게 됩니다. 2007년 7월 타이완의 청타이 코브라스에 자비를 틀여서 테스트를 받아 합격 되었으나 원 지명권을 가진 롯데 구단의 반대로 KBO가 타이완으로 협조 공문을 보내오면서 CPBL에서 뛰는 꿈도 접고 귀국을 하였습니다. 당시 청타이 코브라스 팀은 김대우 선수를 정식 1군으로 등록 시키려 하였지만, CPBL에서 한국의 KBO와 마찰이 생기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타이완 리그에서 등판 불가의 선택을 내렸습니다.

(당시 계약상, 서류상의 문제로 결국 타이완 팀의 군 미필자 복무 팀과 같은 따이쉰 팀([각주:1])에서 3게임만 등판 하였습니다.)
연도 소속 G Inn W L H S 완투 완봉 BB K E 승률 ERA 
2007 따이쉰팀 3 10.1 0 1 0 0 0 0 0 9 2 0 1.742
통산 3 10.1 0 1 0 0 0 0 0 9 2 0 1.742

국내에 돌아온 후에서 계속 메이져리그와 접촉을 하였으나 이미 유망주의 신분은 잃어버리고 평범한 선수로 전락한 그의 상태가 각종 트라이아웃을 통해 밝혀지게되고 결국 계약에 실패한 그는 국내 복귀를 결심하고 결국 제작년 10월 롯데로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1군 선발경기에서 5연속 볼넷을 주고 다시 2군으로 내려갔지요. 2010시즌에는 꼭 부활하여서 롯데 선발의 한 축을 담당하여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타이완에서 코치와 감독으로도 활약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김용운(金容雲) 코치/감독입니다. 한국전력 팀을 거쳐 프로 원년인 1982년부터 M.B.C 청룡-롯데 자이언츠에서 선수생활을 하고 OB 베어즈에서 코치 생활을 하였고 그 후에 쥔구어 베어스(俊國熊隊)로 와서 체력 담당 피지컬 코치로 있다가 팀 매각 후에 다시 싱농 불스의 감독까지 맡았었습니다. 한국인으로서는 첫 타이완 프로야구 팀의 감독을 맡았지요. 성적은 1996년 후반기리그에서 71게임에서 22승 46패 3무로 승률 0.324를 기록하였고, 1997년 상반기리그에서는 25게임 10승 14패 1무로 승률 0.417을 기록하며 결국 성적부진으로 물러났습니다.

위 자료의 내용은 쥔구어 베어스가 한국 코치 안계장 씨를 수비코치로 임명했다는 뜻입니다. 이는 대만 프로야구 역사상 첫 번째로 한국인 코치가 진출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한국의 저명한 청소년팀 감독 출신으로 여러 차례 청소년대표팀의 코치를 담당했고 현재(당시) 휘문고 감독으로 재직 중이었다는 사실을 적고 있습니다. 여러 제자가 있는데 선동렬 등이 대표적이다.쥔구어 베어스가 그를 수비 코치로 임명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그의 야구 품격은 엄격한 훈련 집행 태도라서 선수들을 엄격하게 잘 지도하여 수비 및 피지컬 훈련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또, 한국을 잘 아는 그의 능력으로 다른 좋은 한국 선수들을 우리 팀으로 데려올 수 있는 면에서 그를 기용했다는 내용입니다.  당시 대만 연합뉴스에 실렸던 안계장 씨의 쥔구어 베어스 수비코치 계약 신문 내용으로 옛 자료의 DB를 캡쳐했습니다.


2015.2.7 업데이트
안계장(安啟漳) 코치는 1947년 생으로 야구계 원로십니다. 전남고, 배재고, 선린상고, 휘문고 前감독으로도 활약했고, 오비 베이스의 스카우트로 활동하였던 분인데, 이 분은 대만 쥔구어 베어스의 수비 코치로 활약하면서 나중에 한희민 선수를 데려오기까지 큰 역할을 했던 분이라고 합니다. 1993년 11월 5일 쥔구어 베어스와 계약(이것이 대만 프로야구 역사상 첫 번째 한국인 코치가 된 사례입니다.)을 했고, 1994년 12월에 오비 베어스와  스카우트 계약(이때 스카우트를 하던 前 롯데 감독 출신인 양승호 씨가 안계장 씨가 스카우트로 오면서 대신 2군 코치로 발령받았습니다.)을 하면서 귀국했습니다. 나중에 안계장 씨는 8개 구단 스카우트 협의회 회장까지 역임했습니다.


당시 타이완 야구계에 한국 야구선수들이 빈번하게 노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전에 1984년 실업팀 한국 화장품에서 투수생활을 하면서 최우수 투수상까지 받아쏙, 싱농 불스의 감독과 EDA 라이노스 감독으로 지내다 돌아가신 쉬셩밍(徐生明) 씨와 위에서 쓴 김용운 전 싱농불스 팀의 코치/ 감독 및 안계장 쥔구어 베어스 수비코치 때문이었습니다. 쉬셩밍씨가 한국에서 선수 생활을 한 덕분에 많은 선수들을 알게 되었고, 안계장 쥔구어 베어스 수비코치가 한국 출신 제 1호 선수였던 한희민 선수를 쥔구어 베어스(뒤에 1995년 당시 5억 2,700만 위엔(182억 원 정도)에 싱농 불스팀으로 매각하였습니다.)에 권유하여 대만에서 뛸 수 있었던 이유도 그런 그들이 있었던 덕분이었습니다.  


한국에서 프로 1군 진입에 실패하거나 2군에서 퇴출 된 선수들 위주로 많이 타이완으로 건너가서 테스트를 받고 시작하였지만 그 결과는 크게 좋지 못했지요. 아무튼 지금은 그런 서로간의 교류조차도 없어진 현실입니다. 한국 야구가 타이완 야구보다 실력이나 시스템적으로 조금 더 발전을 한 이유도 있고,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여러가지 적응의 어려움도 있는 이유 등으로 양국간의 교류는 점차로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1. 타이완 프로야구 2군 따이쉰란뚜이(代訓藍隊)를 아시나요? http://chinesebaseballstory.tistory.com/124 타이완 야구선수의 병역 대체복무제도에 대한 설명. http://chinesebaseballstory.tistory.com/12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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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타이완 야구에 대한 전문블로그입니다. 점차 발전하는 중화권 야구에 대한 정보를 모아 지피지기하는 마음으로 만들었습니다. 아무튼 많이 사랑해 주시면 좋겠네요.

 국제대회에서 만나면 늘 한국과 끝장 승부를 펼치며 격전을 치르는 타이완 야구에 대해서 그저 우린 한국보다 약체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타이완 야구에 관해서 제대로 된 정보도 없고 막연하게나마 그저 약하지 않나? 라는 느낌만을 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국인 선교사에게서 야구를 전수받았고, 타이완은 일본인으로부터 야구를 배웠습니다. 

 그 차이가 별로 없을 것 같지만, 현재 타이완의 야구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어느 정도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한국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타이완 야구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그저 떠도는 풍문이나 낭설, 또는 근거 없는 소리가 난무한 현상이 많기에 10부작 기획 시리즈로 타이완의 야구역사와 그 발전사를 소개합니다. 

 각종 내용의 참조와 관련 사진 및 영상 자료는 타이완의 야후와 구글, 그리고 타이완야구 위키백과, 그리고 타이완 야구 100년사 동영상 등 여러 자료를 참조하였습니다.


타이완 프로야구 팀의 중흥기

타이완 프로야구 연고지 주의 당시 구역도/제작 竹板凳


야구의 프로화가 시작되면서 그간 죽어있던 3급야구 또한 같이 부활의 조짐이 보였습니다. 타이완의 프로 야구는 1989년 처음 연맹(中華職業棒球大聯盟:CPBL)을 만들었고, 다음 해인 1990년 처음 4개 팀[싼상 타이거즈(三商虎隊)와 웨이취엔 드레곤즈(味全龍), 통이 라이온즈(統一獅), 슝디 엘리펀츠(兄弟象)]으로 먼저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 1993년 스바오 이글스(報鷹隊)와 쥔구어 베어즈(俊國熊) 등 두 팀이 더 늘었고, 다시 1997년 허신 웨일즈[和信鯨隊:뒤에 중신 웨일즈(中信鯨)로 개명]가 추가되면서 모두 7개 팀으로 늘어난 것입니다. 그러면서 프로야구가 타이완에서 부흥기를 맞이하면서 각계각층의 관심과 관중 수(아래 CPBL 관중 수 표 참조)도 꾸준히 늘어나면서 1993년부터 1996년까지 최절정의 시기를 맞게 됩니다. 


각 기업체에서는 스폰서를 따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였고, 구장 광고나 각종 프로모션에서 프로야구와 관련된 마케팅을 연계하느라 바쁜 절정의 시기였습니다. 아마추어 팀의 창단도 늘어났고, 학생 야구도 덩달아 다시 많아졌고, 지원도 풍부해 졌으며, 야구 인프라에 대한 투자도 많이 늘어나는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국제 대회에서의 성적도 비교적 좋은 편인지라 이 시기를 거치면서 타이완 사람들의 생활 속으로 깊숙히 파고든 진정한 야구의 부흥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TML의 성립과 분열 조짐


타이완 직업야구 대연맹(T.M.L.Taiwan Major League)은 1996년 원래 CPBL에 참가하기로 되어 있었던 성바오 회사(聲寶公司)의 성바오 자이언츠 팀이 참가 권리금 및 여러가지 이유 등으로 참가할 수 없게 되자 당시 니옌다이 방송국(年代電視台)의 회장인 치우푸셩(邱復生)과 성바오 회사의 천청티엔(陳盛沺)의 지원 아래 1996년 1월20일 독자적으로 리그 운영 회사인 나루완(那魯灣) 주식회사를 만들어서 프로야구 운영을 맡기는 형태로 창설된 타이완의 두 번째 야구리그입니다.


사전 리그창설 준비운동으로 바쁜 나날을 보낸 후 T.M.L은 성바오 린코우 야구장(聲寶林口球場)에서 첫 훈련을 가졌고, 1996년 6월 18일에 네 개 팀으로 정식 리그 출범을 알렸습니다. 참여 팀은 타이베이 타이양 팀(台北太陽隊/Taipei Gida), 지아난 용스 팀(嘉南勇士隊/Chianan Luka), 가오빙 레이공 팀(高屏雷公隊/Kaoping Fala)과 타이중 진깡 팀(台中金剛隊/Taichung Agan)입니다. 


1997년 2월 28일 정식으로 타이완 프로야구 연맹(T.M.L)의 첫 경기를 가지면서 타이완에서 2대 리그(TML과 CPBL)가 동시에 운용이 되는 시대를 열었습니다.


위기에 봉착하다(승부조작 사건) 

1996년에 첫 번째로 프로야구 선수 등이 불법 도박과 승부 조작을 한 사건이 터졌습니다. 수십 명의 선수가 구속되었고, 검찰에 의해 기소 되었으며 그대로 운동을 그만두게 되는 엄청난 사건으로 타이완의 프로 야구계는 이후로 길고 긴 암흑기에 접어들게 됩니다.


그 사건으로 인해 각종 광고나 마케팅 등의 구단 수익 효과가 절대적으로 줄어들게 되었고, 관중들도 커다란 실망감으로 점차 야구장을 떠나게 되었고, 구단은 줄어드는 수입으로 인하여 선수를 팔거나 방출하거나 급여를 줄이는 긴축 재정을 하면서부터 점점 전체적인 실력도 떨어지게 되었고, 관중들이 느끼는 재미도 없어지면서, 구단의 재정난이 반복되고, 그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승부 조작과 암흑 세력과의 연계로 불법 도박에 다시 빠지는 등의 악순환의 고리에 올라타게 되었던 것입니다.


TML 리그의 총 관중 수와 평균 관중 수

  TML 연도     게임 수   총 관중수(명)   평균 인원(명)
 TML1996년        192      696999       3630
 TML1997년       216       695936         3222
 TML1998년        168       553659         3296
 TML1999년        168       568080         3381
 TML2000년       120       217716         1814
 TML2001년        144     184103       1278


첫 번째 사건이 터지고 나서 약 9년 후인 2005년에 다시금 20여 명이 연루된 승부 조작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경찰이 연맹의 기록을 압수하고 조사한 후에 약 20여 명의 선수들과 감독, 코치 등의 연루자를 색출하여 기소하는 등 두 번째의 불미스러운 사건이 터지게 됩니다. 

그 후에 많은 선수들과 프로야구 관계자 등이 자정작업을 위한 선언을 하고 자체정화에 나서는 등의 잠깐동안 깨끗해지기는 하였지만 프로야구계에 이미 암흑 세력이 깊게 뿌리를 내려 뻗은 상태에서는 그 효과가 별로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프로야구 구단들은 자정작업을 하거나 클린 선서 운동을 하거나 여러 가지의 부산스러운 움직임을 보였습니다만 큰 효과는 보지 못했습니다.

아무튼, 그 대책으로 만들어진 것이 퇴직 경찰들로 구성된 '자정단(維安小組/ Maintenance Safe Group)'의 창설입니다. 하는 일은 폭력배로부터 선수들의 보호와 검은 세력과의 차단과 구장 및 현장에서의 폭력 및 도박에 관한 관련 증거의 수집과 그 예방이 주목적이지만 실제적으로 그 효과가 선수들에게까지 미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선수들는 여전히 비교적 적은 임금을 받으면서 시합에 뛰어야 했고, 노후대책이 전혀 안된 상태에서 부상이나 각종 이유 등으로 선수 생활을 그만두면 생계가 안되기 때문에, 언제든지 다시 승부조작의 유혹에 빠져들 수 있는 근본적인 문제가 늘 상주하고 있었던 셈이었지요.


그래서 몇 명의 퇴직 경찰들로서는 그런 일들을 모두 예방하면서 막아내기에 사실상의 역부족인 셈이었죠. 이것은 구단들도 역부족이라고 인정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폭력 조직이 개인적으로 선수들을 꾀여내던가, 아니면 경기 외적인 시간에 납치를 해서 위협을 한다든가의 사건을 막아내자는 것인데 실상은 비일비재로 계속 납치와 협박과 유혹이 있었으며, 그것들을 몇몇 퇴직 경찰관들이 다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아무튼, 이번에도 완벽한 수술로 뿌리깊은 악성 종양을 다 도려내지 못한 채 서둘러 배를 닫아버리는 미봉책에 그치면서 다시 그 뒷맛을 남겨놓은 채 야구판은 상처만 입고 다시 어떻게 흘러갑니다. (그 불씨가 다시 2008년에 미디어 티렉스 팀의 폭력배가 개입된 불법 승부조작 및 도박 사건으로 터져나와 팀이 법원에 의해 강제로 해체되었고, 중신 웨일즈 팀은 그런 여파로 자진 해산을 하게 됩니다. 중신 웨일즈 팀은 그 후 다시 재창단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CPBL의 총 관중 수와 평균 관중 추이

      연도별    총게임수       누적 관중 수  평균 관중 수
       1990      180          899,955      5,000
       1991      180        1,050,405      5,836
       1992      180        1,238,063      6,878
       1993      270        1,600,549      5,928
       1994      270        1,607,677      5,954
       1995      300        1,646,361      5,488
       1996      300        1,364,424      4,548
       1997     336        685,832     2,041
       1998      315          690,089      2,191
       1999      278*          496,433      1,786
       2000      180          301,671      1,676
       2001      180          337,707      1,876
       2002      180          532,304      2,957
       2003      300          958,596      3,195
       2004      300        1,051,517      3,505
       2005      301        1,025,695      3,408
       2006     300        679,205     2,264
       2007     300        612,887     2,043
       2008      298**          572,692      1,922
     총계    4,948      17,352,062     3,507
*1999년은 지진으로 인하여 22게임이 취소되었습니다. 
**2008년은 미디어티렉스팀의 강제 해체사건으로 2게임이 취소되었습니다.
굵은 글씨체는 도박사건 이후의 관중 감소 추이를 강조함


프로야구 팀들의 해체 파도와 그 이후.

1996년 쥔구어 베어즈는 구단의 경영권을 싱농기업(興農企業)에 넘기면서 싱농 베어즈(興農熊隊)로 재탄생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뒤에 다시 싱농 불스(興農牛)로 개명을 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1998년에는 스바오 이글즈가 정식으로 해체됩니다. 도박 사건에 크게 연루되면서 기업가치가 폭락하고 구단의 재산인 선수들이 대거 구속되면서 더이상 프로야구 팀을 꾸려갈 여력이 없는 것이 원인이 되어 구단을 해체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1999년 원년 팀이었던 싼상 타이거즈와 웨이취엔 드레곤즈 역시 팀을 해산시켰습니다. 처음 4개 팀으로 시작되어 7개 팀까지 발전되었던 타이완의 프로야구 판은 이제 다시 4개 팀(슝디 엘리펀츠, 통이 라이온즈, 싱농 불스, 중신 웨일즈) 체제로 돌아갑니다.


두 연맹의 경쟁구도


타이완 메이져리그인 TML은 CPBL보다 뒤늦게 생겨났지만 바로 경쟁구도를 갖추면서 겉모습은 본격적으로 경쟁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상을 보면 그 효과는 별로 크지 않았습니다. 구단이 존속하려면 상업적인 이익을 봐야 하는데, 연이어 터진 불미스러운 사건과 사고들로 인해 일반 대중들의 관심이 떠나버렸고, 그래서 구단 자체의 수익도 현저히 줄어든 상태에서 시스템 상으로만 경쟁 구도였지 상업적으로 도움이 별로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선수 수급면에서도 유망주들은 어떻게든 해외로 빠져나갔고 남은 자원을 가지고 TML과 CPBL이 선수 확보 경쟁을 했기에 야구 자체에 대한 발전도 더디고 오히려 지원도 없어지고 심리적인 의욕이 떨어진 선수들로 인해서 전체적인 리그가 하락세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던 시기였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두 연맹의 통합에 대한 내용과 다시 인기를 살리기 위한 여러가지 노력 등을 소개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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