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출신 선수로 쥬니치 드레곤스와 한신 타이거즈에서 뛰었던 거포 좌타자 다이호(大豐泰昭: Taiho Yasuaki) 선수(중국 이름은 천다펑:陳大豐).

1991년 한일 슈퍼게임에 일본 대표로 나오면서 한국 중계 티브이로 자세하게 소개되어 한국야구팬에게도 꽤 익숙했던 선수입니다. 그 다이호 선수가 지난 2002년 은퇴한 후 쥬니치의 스카우트를 끝으로 소식이 없었는데 지난 18일 밤 10시 49분에 급성골수성백혈병(혈액암)으로 나고야의 한 의원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오랜 쥬니치 시절을 끝내고 한신을 이적한 후의 다이호 선수 모습/사진 대만 이티투데이 뉴스 

 
지난 2009년 발병한 혈액암의 일종인 백혈병으로 무려 6년 넘게 투병하다가 어제 밤 향년 51세(1963년 생)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발병한 후 여러 차례의 수술과 여동생의 골수이식 제공 등으로 몸 상태가 호전되어 퇴원 후 좋아지는 듯했는데 작년에 암이 재발하여 투병하다 결국 어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다이호 선수의 일화 중 하나는 바로 지금은 메이저리그 볼티모어 오리올스에서 당당한 선발 한 축을 담당하는 천웨이인(陳偉殷) 선수를 일본으로, 쥬니치 드레곤스로 데려 온 장본인이라는 점입니다. 천웨이인 선수가 대만국립체대(당시 국립체육원) 시절에 바로 이 다이호 선수가 직접 주선을 하여 쥬니치 드레곤스와 입단 계약을 할 수 있었습니다. 


대만 선수로 첫 번째 학생 신분으로 NPB에 직접 진출한 케이스가 된 천웨이인은 그 이후 다이호 선수의 세심한 보살핌과 조언과 더불어 쥬니치 구단의 정성스러운 보살핌과 관리에 힘입어 부쩍 성장했고, 현재의 메이저리거가 되어 다이호 선수를 기쁘게 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다이호 선수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천웨이인 소속 에이전트 회사는 바로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대략적인 내용은 "非常感謝他過去的照顧,很遺憾聽到這個消息" "(다이호 선생님께)예전에 (천웨이인을) 돌봐주고 보살펴 주어서 매우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런 안 좋은 소식을 듣게 되어 정말로 안타깝습니다." 라고 애도하며 비통해했습니다.


병세가 완연한 모습으로 대만 야구팬에게 중국어로 인사를 하는 생전의 다이호 선수 모습 (자신의 식당에서 '대만에 계시는 야구 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로 시작하여 담담하게 자신의 발병 사실과 항암투병 중이고 절대 방치하지 않고 열심히 치료하여 꼭 나을 것이고 건강 조심하시고 힘내라는 내용의 영상입니다.)


이호 선수는 대만에서 대학에 입학한 후 바로 나고야 상과대학 야구부로 건너가서 외국인 최초로 일본대학야구 대표팀에 뽑히기도 했었습니다. 그 5년 후 일본 드래프트에 일본 선수와 동등한 자격으로 진출하여 프로 유니폼을 입은 선수입니다. 일본야구의 '5년동안 일본에 살고 있는 선수는 외국인이 아닌 일본인과 동등한 자격을 부여하는 조항'에 의하여 그해 쥬니치 드레곤스의 유니폼을 입었습니다. 1988년 당시로는 꽤 큰 금액인 계약금 6천만 엔과 연봉 8백만 엔의 계약이었습니다.


 

 


그 이후 쥬니치에서만 열한시즌(2009~2010년 한신 타이거즈)을 뛰었습니다. 중간에 한신으로 이적했다 다시 2011년에 쥬니치로 돌아와서 두 시즌을 더 뛰고 2002년을 마지막으로 은퇴했습니다. 그 후에 쥬니치의 스카우트로 활동하다 발병사실을 알고 모든 업무를 접고 생활방편으로 나고야에서 중화요리집인 '대풍레스토랑(豊飯店)'을 하면서 투병 생활을 해왔습니다. 1990년에 일본 연예계 인물인 부인(笙田弘子)과 결혼하여 화제를 뿌리기도 했던 다이호 선수는 슬하에 두 명의 딸이 있습니다.


NPB 통산 성적은 아래 표를 보시면 됩니다.(표 자료 대만 위키 참조)


생전의 다이호 선수는 센트럴리그 통산 세 번의 올스타전 출장과 1994년 홈런왕과 타점왕 등 2관왕과 그해 베스트나인에서 최우수1루수로 뽑히는 등 전성 시기를 맞았습니다. 1996년에는 연속 다섯 경기 홈런의 기록도 세우는 등 대만 출신의 거포 선수로 활약하면서 1991년 한일슈퍼게임에 일본대표로 참가하여 한국 야구팬들에게도 그 이름이 알려졌습니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어떤 한국투수에게 몸쪽 공에 삼진을 당하고 투수를 쳐다보면서 잘던졌다는 듯 표정을 지어 보이고 들어가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아무튼, 대만 출신으로 일본프로야구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며 사랑받았던 다이호 선수. 51세라는 비교적 젋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한국의 고 최동원(1958년 생) 대선수도 췌장암에 걸려 다이호 선수보다 훨씬 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 오늘따라 그 두 선수가 오버랩이 되면서 추억에 잠기게 되네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블로그 이미지

대치동갈매기

중국과 타이완 야구에 대한 전문블로그입니다. 점차 발전하는 중화권 야구에 대한 정보를 모아 지피지기하는 마음으로 만들었습니다. 아무튼 많이 사랑해 주시면 좋겠네요.

안녕하십니까? 중국과 대만야구 전문 블로그인 Chinese Baseball Story에서는 '대만의 야구선수들' 이라는 기획 기사를 준비하였습니다. 대만 출신으로 MLB, NPB 등의 해외 리그와 자국 CPBL 에서 뛰고 있는 주목할만한 선수를 기획하여서 한 사람씩 소개하는 코너를 새로 만들었는데 그간의 의견을 종합하여 만들었습니다.
(제가 생각한 선수도 물론이지만 대만 야구에 관해 궁금하신 선수가 있으면 알려 달라고 의견을 내주시는 독자 참여에 오른 
왕지엔민(王建民), 천진펑(陳金峰), 궈홍즈(郭泓志), 후진롱(胡金龍), 펑정민(彭政閔), 쟝지엔밍(姜建銘), 차오진후이(曹錦輝), 린웨이주(林威助), 쟝타이산(張泰山), 천용지(陳鏞基), 천웨이인(陳偉殷), 장쯔지아(張誌家), 린커지엔(林克謙), 뤼밍츠(呂明賜), 궈리지엔푸(郭李建夫) 순 입니다.

현재 우리가 잘 모르던 예전에 활약하던 선수들도 있고, 잘 알려진 메이져리거들도 있습니다.그동안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아서 이름등이 아무렇게나 마구잡이로 불려지던 대만의 야구선수들에 대하여 소개하는 기획을 시리즈로 준비하였습니다. 그들의 정확한 이름과 어떤 선수인지, 또는 어떤 배경과 어떤 실력을 가지고 있는 선수인지 궁금한 점들을 이번 기획을 통하여 자세하게 여러분들께 소개하려 합니다.

원어 표기는 외국의 국호나 지명, 인명의 표기에 관한 지침을 참고하여 여기서의 표기는 전부 중국어의 원음을 그대로 읽는 것을 한글로 표기할 예정입니다. 그 표기만 따라 읽어도 자연스럽게 중국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발음이 되는 것입니다.(왜 한국어 한자로 읽으면 안되냐고 물으신다고 해도 ^^ 그건 제가 중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입장이라서 이기도 합니다. 현재의 신문 등에서 쓰이는 외국어 표기법과는 약간 다를 수 있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천웨이인(陳偉殷/ Chen Wei-Yin)

                                          (국가대표 팀에서 투구하는 모습)

정확한 발음의 이름은 천웨이인 입니다. 첸웨인, 천웨인 등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정확하게 부르는 것이 좋겠죠? 1985년 7월생으로 현재 24세입니다. 182cm/80kg으로 운동선수로는 크지도 작지도 않는 적당한 신체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좌투와 좌/우타석에서 스위치를 할 수 있다고 합니다만 아무래도 좌타가 더 편하겠네요. 최고구속은 153km/h를 던졌는데, 평균 속도는 145mk/h를 던졌습니다. 자로 잰듯한 직구를 주무기로 슬라이더와 체인지업, 스플리터과 커브, 그리고 커터를 던진다고 알려져 있습니다만 전부 다 던지지는 않고 손에 익은 몇 개만 던지고 있습니다.

타이완 남부 가오슝현에서 태어난 천웨이인은 국립체대를 거쳐 2003년 일본 쥬니치 드레곤즈와 자유계약을 맺어 도일하였습니다. 계약금은 85만 달러에 당시 1200만 엔의 연봉으로(2009년 현재 연봉 3500만 엔)을 받고 진출하였습니다. [학력은 가오슝의 빠과소학교(八卦國小)를 거쳐 런우중학교(仁武國中), 치아오토우중학교(橋頭國中)를 거쳐 가오위엔공상(高苑工商), 그리고 타이베이현 아래의 타오위엔현(桃園縣)에 있는 국립체대(國立體院)야구부를 나왔습니다.]

이 선수는 고등학교(가오위엔공상/高苑工商) 시절부터 학교의 에이스 투수로 활약하면서 미국으로 진출하려는 꿈을 먼저 가졌지만 2003년 야구월드컵 대회 후에 일본구단의 적극적인 영입 정책으로 일본으로 턴을 하여 최초로 학생 신분으로 일본 프로야구 연맹에 진출하게 된 케이스입니다.

국가대표 경력

2001년 제 10회 IBA 세계 청소년(AAA)야구 선수권대회 대표
2002년 제 20회 IBA 세계 청소년(AA)야구 선수권대회 대표
2002년 제 15회 대륙간컵 야구대회 대표
2003년 제 05회 아시아 청소년야구 선수권대회 대표
2003년 제 35회 야구 월드컵대회 성인팀 대표
2004년 제 28회 아테네 올림픽 야구대표(군면제혜택)
2008년 제 29회 베이징 올림픽 야구대표

아무튼 일본으로 건너가서 주로 2군에서 육성되면서 기초를 다지고, 주로 중계로 많이 등판하곤 했습니다. 후에 쥬니치에서는 천웨이인을 이마나카 신지(今中慎二)와 같은 투수로 육성시키려 하였습니다. 그래서 천웨이인의 별명도 '이마나카 2세', 혹은 '이마나카 2호기'랍니다. 어쨌든 2군에서의 육성 과정을 거쳐서 그 해 8월에 아테네 올림픽 대표로 소집이 되면서 잠시 1군에 등록이 되었지만 게임에 나가지는 않았지요.

베이징 올림픽 당시의 모습


그 후에 2005년 리그가 시작되고 1군에 합류하면서 4월 3일 1군에서 첫 등판을 하게됩니다. 요코하마 팀을 상대로 중계 투수로 나와서 2 이닝동안 5 피안타 4 사사구와 3 삼진을 하며 4 자책점을 기록하였습니다. 형편없는 성적이었죠. 그래서 다시 2군으로 내려가게 되었지요. 후에 다시 6월 27일에 돌아와서도 계속 불안한 모습을 보여 패전 처리용으로 주로 뛰게 됩니다. 하지만 8월 7일에는 연장 11회에 나와서 처음으로 세이브를 기록하는 기쁨도 맛보게 되지요.

하지만 그 후 2006년에 시련이 닥쳐옵니다. 왼쪽 팔꿈치가 아파서 진단을 받았는데 수술을 해야 한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해 말에 11월14일 나고야의 병원에서 세 시간에 걸친 팔꿈치 수술과 인대 접합술을 받고 요양을 하게 되었습니다.  쥬니치 구단에서는 일단 그 때까지의 선수 계약을 말소시키고 다시 육성군으로 갱신하여 3년 내에는 천웨이인 선수를 해고할 수 없게끔 조항을 삽입하는 계약을 맺습니다. 장래성을 보고 구단에서 좋은 조건으로 계약을 갱신 한 것이지요.

그럼으로 천 선수는 안심하고 푸욱 요양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구단의 전폭적인 지지 하에 재활 과정을 거쳐서 다시 예전의 구속을 회복(?), 아니 조금 더 빨라진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타이완에서 최고 구속이 150km였는데(평속 142km/h정도), 인대 접합술을 받고 난 후에 회복을 잘 해서 오히려 본인 최고 구속은 153km(2009년 8월에 한신 타이거즈를 상대로 기록함), 평속은 145km/h로 빨라지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구속과 구위가 예전에 비해 증가한 상태로 맞이한 2008년 시즌 4월 2일에 요미우리를 상대로 한 시리즈에서 선발 야마모토 마사(山本昌/Yamamoto Masa)를 구원 등판하여 5.2이닝동안 19 타자를 맞이하여 1 탈삼진에 2 사사구에 무실점으로 잘 막아내면서 프로 역사상 자신의 첫 승을 기록하게 됩니다.(경기 후에 세이브를 따낸 이와세가 그 첫 승 공을 선물했다고 하네요.)

그 후에 계속 1군에서 중계투수진으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하다가 6월 중순에 주니치의 선발진들이 2군에 떨어지거나 일본 대표팀 합류를 위해 빠져나가서 선발진으로 합류를 하게되었고, 7월 16일에 드디어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상대로 본인의 첫 선발승을 기록하고, 다시 9월에는 본인의 첫 완봉승을 거두게 되면서 쥬니치의 1군 선발진으로서 탄탄대로(연봉계약도 조정되어서 600만엔에서 3500만엔으로 2008년 당시 연봉상승율은 리그 최상급의 상승을 함)를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9월8일 대 한신타이거즈를 상대로 2안타 완봉승 달성 영상)

이 선수는 타석에서도 스위치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래저래 화제에 올랐습니다. 2009년에 들어서 그 기세가 더욱 위엄을 떨치면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로 잰듯, 쭉쭉 뻗는 듯한 직구가 위력을 떨치면서 덩달아 슬라이더와 체인지업도 그 위력이 배가되면서 현재 8승 3패로 1.45의 방어율로 센트럴리그에서 방어율 선두를 달리고 있습니다. 총 19 게임 등판에 완투와 완봉이 모두 9차례나 될 정도로 이닝이터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면서 욱일승천의 기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천웨이인의 일본에서의 성적표)

현재 들리는 소식(일본의 스포츠호치 보도)에 의하면 현재 미국 MLB의 최소 15개 구단이 천웨이인 선수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타이완의 출처는 링크:출처) 이미 화이트삭스의 경우는 극동 지구의 스카우터(Steve Wilson)를 파견하여 면밀히 관찰하고 있는 중이고, 내년이나 내후년에는 미국으로 가지 않겠나하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제가 예상하기로는 아마도 이 선수의 꿈이 메이져리거이니 어떻게든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을 때 가지 않겠냐는 생각입니다. 계약기간이 아직 남아있고, 쥬니치에서는 포스팅이든 뭐든 아예 안보내려 하겠지만 뭐 앞 일은 모르는 법이라서요...^^

쥬니치에서의 모습

쥬니치의 전설적인 투수로 통산 200승을 거둔 스기시타 시게루(杉下茂/sugisita sigeru) 전 단임코치는 몇 년전 스프링캠프에서 천웨이인을 두고 자신의 투구 폼에 대한 적극적인 학습 의지를 먼저 밝히는 모습을 볼 때 대단한 투수가 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또한 스기시타 전 코치는 본인이 선수로 뛰던 시절인 1954년에 방어율왕을 하면서 세운 기록이 1.39인데(이 기록이 쥬니치의 통산 최고 기록입니다.)아마 이 기록도 천웨이인 선수가 깰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무튼 현재 타이완 출신의 선수로는 최고의 실력과 구위를 자랑하고 있는 대표적인 선수입니다.

천웨이인 선수는 이번 태풍 모라꼿으로 엄청난 재해를 입은 곳에 타이완 돈으로 250만 위엔(한국 돈 약 9천만원)의 성금을 기부하면서 여러모로 훈훈한 모습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앞으로 전망이 매우 뛰어난 선수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부상의 전력이 그를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말이죠. 광저우 아시안게임에 타이완 대표로 참가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한국의 팬들까지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만 제 생각은 아무래도 참가하기 어렵지 않나입니다. 아마도 평생의 꿈인 메이져리거가 되기 위하여 노력할 것 같은 느낌입니다.


update: 2011년 말 미국 볼티모어와 입단계약을 하여 메이저리그에 진출했고 2012년 12승을 올리면서 인상적인 활약을 하였습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블로그 이미지

대치동갈매기

중국과 타이완 야구에 대한 전문블로그입니다. 점차 발전하는 중화권 야구에 대한 정보를 모아 지피지기하는 마음으로 만들었습니다. 아무튼 많이 사랑해 주시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