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자료는 스포츠 비지니스 리뷰 6월호에 기고한 원고로 본 블로그의 자료와 부분 중복된 내용일 수도 있습니다.
지난호에서 타이완 프로야구의 아픔과 현실에 대하여 알아봤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타이완의 야구 시장과 인프라 그리고 타이완 야구가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하여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야구시장이란 야구가 가진 마켓규모, 즉 야구인구와 상업적인 규모, 그리고 야구 관련 인프라와 야구를 즐기는 인구 등을 말합니다.
먼저 야구가 타이완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역사적으로 어떤 일들을 거치면서 야구가 국민 스포츠로 정착이 되었는지를 알아보고 초, 중, 고교 야구 팀과 리틀야구, 실업야구 팀의 규모와 프로구단을 포함한 야구 인구가 얼마인지 알아보고, 마지막으로 야구가 가진 마켓 규모와 타이완의 야구 인프라에 대해서 알아보고 앞으로 타이완 야구가 가야 할 길에 대해서 적어보겠습니다.
타이완 야구중흥의 역사에 대한 간략한 서술
타이완에 야구가 들어온 연도는 지난 호에서 밝혔듯이 1906년입니다. 타이완은 일제 강점기가 무려 50년이 되었지요. 처음 총독부가 타이완에 세워지고 그 영향 하에 야구팀도 만들어지게 되면서 야구가 타이완에 전해지게 됩니다. 그 후에 일본인들과의 교류로 인해서 점차 인기 스포츠로 자리매김을 해나가면서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윌리엄스 포트(Williamsport)임을 알리는 표지판
그리고 몇 십 년 후에 타이완 야구의 절정기를 맞이하는데, 1969년 진롱(金龍)야구팀이 세계 리틀야구선수권 대회인 윌리엄스 포트(Williamsport) 배에서 우승한 후, 1996년까지 모두 17 차례나 우승하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타이완 청소년 야구 팀은 1972년 또다시 이번엔 리틀야구의 성지인 윌리엄스 포트 시가 아니고 미국의 다른 도시 게리(Gary; 시카고 부근)시에서 처음으로 열린 세계 리틀야구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또 차지하였습니다. 리틀 야구보다 더 나이가 많은 청소년 야구 팀은 1974년 미국 로더데일에서 열린 대회에 처음 참가하게 되는데 리틀야구와 마찬가지로 1996년까지 모두 17회나 우승하는 엄청난 강세를 보여줍니다. 그런 기념으로 화폐까지 만들어서 기념을 하였습니다.
(리틀야구에서 세계제패를 한 기념으로 발행된 화폐입니다.)
타이완의 3급 야구팀(리틀 야구, 청소년 야구, 청년 야구를 3급이라고 함)은 모두 6번이나 3급 야구팀 동반 우승의 기염을 토하는데 1974년, 1977년, 1978년, 1988년, 1990년과 1991년까지 총 여섯 번입니다. 이 시기를 가리켜 대만야구 3관왕의 광풍 시기라고 합니다. (1984년에는 서울에서 리틀야구 월드시리즈 챔피언십 대회가 열렸는데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제이슨 베리텍(보스톤 레드삭스 팀 소속 포수)도 알타몬테 스프링스 팀 소속으로 한국에 왔었죠. 그땐 몰랐겠죠? 나중에 유명한 메이져리거가 된다는 것을.)
장기 발전의 기초를 닦다.
이 시기야말로 타이완 야구계에 있어서 야구의 부흥기를 지나 전 세계에 타이완 야구가 무엇이다 라고 보여준 활황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의심할 수 없는 크레이지 모드였고 이런 결과들이 대만 사람들에게 민족적인 자긍심과 기개를 떨치게 해 준 그야말로 야구 이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쾌감을 안겨다 준 르네상스 시기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중에 3급 야구의 활황세가 타이완에 야구의 기초를 확실히 닦아주었기에 나중에 성인 야구에서 수많은 좋은 선수가 배출이 되고 자연스럽게 전체적인 기반이 튼튼해지는 결과를 가져왔고 타이완 야구가 세계에 실력을 떨치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성인 시기의 타이완 야구(1980년~1990년대)
1980년~1990년대의 타이완야구는 장기적으로 좋은 결과의 꽃을 피우기 위한 노력을 하던 시기입니다. 당시 타이완의 성인 야구는 국내외의 정치적인 요소(
몇 년 후에 타이완 성인야구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옌샤오쟝(嚴孝章) 야구협회 이사장(아시아 야구연맹 부회장 역임)의 노력 끝에 정치적으로 얽힌 문제(中共과의 정치적인 문제는 국호의 사용 문제와 국기의 사용 문제를 놓고 대립 각을 세웠던 일을 말합니다.)를 풀고 다시금 여러 국제 대회에 참가하기 시작했습니다.
1982년의 서울에서 열린 세계 베이스볼 월드컵(Baseball World Cup: 당시의 명칭은 세계 야구선수권 대회)에서 타이완 성인야구 대표팀은 6승 3패의 전적으로 한국과 미국 일본에 뒤져 4위를 차지합니다. 당시 한국 팀은 8승 1패의 성적으로 우승하게 되는데 잠실 야구장에서 선발
이어 다음 해 열린 아시아 야구선수권 대회에서는 한국과 일본, 대만이 각각 5승 2패로 공동 우승을 차지하였는데, 일본을 꺾은 결과가 다음 LA올림픽 야구 출전권 획득이라는 수확을 안겨다 줍니다. 그 해 열린 대륙간 컵에서 타이완 팀은 3등을 차지 하였습니다. 이변인 것은 야구 절대 강국인 쿠바를 타이완이 13대 1로 이기는 파란을 몰고 왔던 대회이기도 하여 기억에 남습니다. 그리고 참가하게 된 제 23회 LA 올림픽에서 3, 4위 결정전에서 한국을
같은 해에 열린 세계 야구선수권 대회에서도 쿠바에 이어 은메달을 차지하였고, 1986년 네덜란드에서 거행된 세계야구 선수권대회에서도 동메달을 따냄으로써 대만 성인야구의 전성기를 이어갔습니다. 그 이후에도 1987년 아시아 야구선수권 대회 은메달로 올림픽 참가권을 따내어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참가하였으나 예선 3연패로 탈락하였고, 이후 1991년 중국에서 열린 아시아 야구 선수권대회에서는 은메달로 다시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출전권을 따내었습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따낸 타이완 야구 대표팀 수상 장면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처음 정식 종목으로 편입된 야구경기에서 타이완 팀이 은메달을 따냄으로써 타이완 야구 최고의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기사에 은메달을 따고 돌아온 야구 대표팀에게 상금 등으로 모두 1억1550만 위엔(현재 환율로 환산하면 한국 돈 50억 가량으로 코치진과 선수단 포함하여 24명 규모로 일인당 약 2억 원 가까이)을 주었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당시 2억의 돈이면 정말 어마어마하게 큰 돈이지요.
아무튼 당시 80~90년대에 활약하던 선수들이 바로 현재 타이완 야구팀들의 코치 급이나 감독 급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유명했던 선수들의 면면을 돌아보면 지금도 유명한 일본 한신 타이거즈에서 활약한 궈리지엔푸(郭李建夫), 일본 난카이 호크스에서 활약한 가오잉지에(
예전 야구를 좋아하셨던 분들이라면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 봤음직한 선수들이죠. 이 중에서 쉬성밍(徐生明)씨는 타이완에 돌아가서 나중에 한국 선수들을 여려 명 데리고 갔었지요. 아무튼 그 후에 실업 팀들이 주축이 되어 프로화 추진을 하여 1990년에 첫 작업에 들어가서 프로야구가 탄생하게 됩니다.
이상이 간략하게나마 타이완 야구 중흥기의 역사입니다. 그러한 중흥기를 거쳐서 야구의 프로화가 타이완에 정착이 되면서 국민 스포츠로 한층 더 발돋움을 하게 되었습니다. 야구가 타이완 경제에 미치는 효과를 따져보면 단순한 야구 경기의 개최가 아니라 멀티미디어 시대에 있어서 각종 프로그램으로 제작되고, 방송으로 전파되면서 야구에 대한 저변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관련 경제 규모도 같이 커졌습니다.
그래서 알아볼 것이 바로 타이완의 야구 시장의 경제적인 규모입니다. 현재는 프로 팀이 4개 팀으로 줄어들었지만 절정기에 달할 때는 11개 팀(TML과 CPBL 양대 리그)이나 있었을 정도로 호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각종 승부조작과 불법도박의 여파를 맞아 4개 팀으로 축소되어 마치 원년의 그것처럼 운영되고 있지만 정부에서 강력한 의지와 구단 및 선수들이
타이완 어린이 야구단의 모습을 그린 영화 '야구소년'
현재 타이완의 야구 인구(등록된 선수 포함 일반 아마추어 동호인까지 포함한 수)는 약 200만 명(2200만 명의 인구 대비 약 10%정도) 정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등록된 선수는 구체적인 자료는 없지만 대략적으로 따져보면 2010년 야구 대회(TOTO盃)에 참가 등록 신청을 한 리틀야구 팀은 84개(팀당 대략 35명 수준)정도이고, 올해 2010년 3월 전국 청소년 야구대회에 참가 신청을 한 중학교 팀은 65개(팀당 30명 수준) 정도이고, 고등학교 야구 55개 팀(팀당 35명 수준)이 있습니다. 그리고 대학 팀을 포함한 실업야구 팀은 몇 대략 29개 팀(팀당 40명 수준)이 있습니다. 그것을 근거로 해서 야구 선수를 따져보면 대략 8,000명 정도 입니다. 거기에 프로 4개 팀과 2군을 포함시키면 대략 8,200 여 명이 야구를 직업(리틀야구 선수는 직업으로 갈지 취미인지 구분이 안 가지만 일단 같이 포함시켰습니다.)으로 삼기 위해 뛰는 등록된 선수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숫자는 정확한 자료는 아닙니다. 밝혀진 학교 개수를 판단해서 자체 추산한 것으로 어느 정도 오차는 있을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타이완의 야구시장의 경제적인 규모(韓化 대비)를 따져보면 작년도 타이완의 프로야구 시장은 대략 1,000억 원대로 알려져 있습니다. 작년(2009년) 총 관중 규모(작년 90만 명/한국 대비 6분의 1 규모)로 따져보면 4개 팀의 입장 수익이 대략 72억 원 정도이고, 선수단 연봉(평균 4,000만 원 선으로 구단 임직원과 선수단 규모 합산한 평균 금액)이 대략 50억 원(한국의 절반 규모) 정도, 그리고 방송 중계권료(타이완 프로야구 중계권은 연간 40억 원 선으로 웨이라이 TV에서 독점하고 있습니다.)와 팀 당 벌어들이는 광고 비용(연간 총 규모가 200~400억 원 선으로 팀 당 50~70억 원 선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이 광고 비용 수치는 타이완 야구 관계자의 말로 최고치에 이르렀을 때의 비용을 추정, 계산한 것으로 실제와는 다를 수 있습니다.), 또 각종 프로야구 관련 상품이나 관련 물품 등의 최대 경제효과는 대략 200억원 대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야구 경기로 인해 유발된 경제적인 측면은 관중 1인당 평균 15,000원 정도의 소비를 한다고 조사된 바 있는데 그걸 근거로 하면 약 135억 원 정도입니다.
대충 합해보면 700~900억 정도 되는 금액이 타이완의 프로야구에서 발생되는 금액이라고 보시면 되겠네요. 거기에 파급되는 효과까지 따져보겠습니다.
(작년 말에 총 공사비 385억 원을 들여 새로 건립된 타오위엔 칭푸국제야구장: 桃園青埔國際棒球場)
파급효과 중 야구 관련 인프라에 대해서 들어가는 금액을 따져본다면 작년에 한 개의 구장(현재 CPBL이 프로야구 경기를 치를 수 있는 사용 가능한 구장은 모두 12개입니다. 티엔무(天母), 신좡(新莊), 신설된 타오위엔(桃園), 신주(新竹), 타이중(台中), 조우지(洲際), 또우리우(斗六), 지아스(嘉市), 타이난(台南), 가오슝시립(高市), 가오슝현립(高縣), 뤄동(羅東) 구장 등이고 12개 구장 모두 천연잔디 구장이고 수용 인원은 최소 5,500명~20,000명입니다. 현재 올해 열릴 대륙간 컵 대회를 위해 외부 조명 공사 중인 타이중 조우지 구장 외에 현재 건설 중에 잠시 중단 된 타이베이에 들어설 돔구장까지 포함하면 13개가 될 예정입니다. 이 외에도 각종 프로 팀 훈련 보조구장과 각급 학교의 야구부 구장 등을 합하면 타이완은 60여 개가 넘는 정식 규모의 야구장을 보유하고 있다고 타이완 협회 관계자에게 들었습니다.)을 새로 지었고, 각종 보조 구장 및 연습장 등의 공사 등을 따져본다면 공사비와 인건비 및 각종 관련 비용까지 포함하면 1,200억 원(이 금액은 돔 구장 및 주변 시설 건설 비용인 총 금액 약 8000억 원 정도를 제외한 규모입니다. 타이완의 돔 구장 관련 뉴스는 홈페이지 참조.) 이상의 경제 유발 효과가 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합쳐 본다면 타이완에서 작년에 야구로만 발생한 경제규모는 대략 2,000억 원 대로 추산할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해외파 선수들도 인해서 유발된 경제적인 효과라든지, 기타 자세한 분야는 제가 추산할 근거자료가 없어서 여기에 따로 포함시키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프로 야구만으로 유발된 경제 규모이고, 그 외에 A-AA-AAA까지의 아마추어 야구의 대회 개최나 운영, 그리고 유지와 각종 장비의 구입 등 관련 물품의 경제적인 규모 등을 추산해보면 대략 2,000~3,000억 원 대의 경제적인 효과가 발생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는 지난 해 부산 사직구장을 근거지로 삼는 롯데 자이언츠의 경제적인 효과가 부산에서 약 1,500억 원의 효과를 봤을 것이라는 추정을 한 적이 있지요. 부산시 주관 하에 있는 ‘부산발전연구원’은 롯데 자이언츠가 창출하는 경제 효과가 올해 1,500억 원에 이른다고 작년에 발표를 했었습니다. 뭐 기준이나 근거 등이 약간 부풀려진 면도 없지 않아 있지만 재작년과 작년에 모두 130만 명 이상의 관중이 사직 야구장을 찾았고 그로 인한 각종 파생 경제효과 등을 따져보니 그렇다는 것이죠.
이처럼 타이완도 국기(國技)가 야구이기 때문에 경제적인 파급 효과는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현재는 잦은 승부조작과 불법 도박으로 인해 민심이 이반되어 프로야구의 인기가 많이 약해졌지만 타이완 같이 국제적으로나 외교적으로 고립될 수 밖에 없는 형편에서 그나마 국제적으로 잘하는 야구가 그들 삶에 차지하는 의의는 실로 대단합니다. 타이완의 국위 선양을 위한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 바로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이고, 그러한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하여 타이완의 집권자들은 국제 야구대회를 타이완으로 유치시켜서 자국민들에게 희열과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야구 외의 다른 종목은 동북 아시아 나라들인 한국, 중국, 일본 등에 밀려서 국제 대회의 참가나 좋은 성적을 내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외교적으로 중국의 방해도 한 몫을 하기 때문에 참 힘든 형편인데 반해서, 야구라는 종목은 타이완이 그나마 세계적인 수준에 접근해있는 몇 안 되는 구기종목이기 때문에 근 십 여 년 동안 타이완에서 많은 수의 국제대회가 펼쳐졌습니다. 대륙간 컵과 야구 월드컵, 그리고 각종 리틀야구, 청소년 야구 및 대학 야구대회 등을 포함해서 자국 프로 리그에 실망한 타이완 국민들이 야구에 관심을 끊게 하지 않으려고 많은 수의 대회를 타이완에서 개최하려는 노력을 했던 결과이지요.
대륙간컵 대회가 열릴 타이중 조우지 야구장(台中洲際球場)
올해도 10월에 타이완의 타이중 조우지 야구장(台中洲際球場)에서 개최가 될 예정입니다. 그리고 한국-타이완 프로야구 챔피언 결정전도 열기로 합의를 봤고, 지난 해까지 일본에서 열리다 재정적인 문제로 없어질 위기에 있는 프로야구 아시안 시리즈도 타이완에서 개최를 희망하고 있지요.
그러나 국제 대회를 유치해서 인기를 되살리는 방법 외에도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조건이 자국 리그를 되살리는 길입니다. 그리고 관련 법 제도를 정비하여 자국의 유망주들이 해외로 쉽게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서 자국 리그에 그 유망주들이 뛰면서 상품성을 기르고, 불법 도박과 승부 조작을 엄단하여 깨끗한 환경에서 공정한 경기를 펼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합법적인 스포츠 배팅을 장려하여 그 수익으로 선수들의 권익에 앞장선다면 도박의 유혹에 빠지는 일도 줄어들 테고, 그러면 자국 리그에서 떠나간 민심을 되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타이완의 야구계는 뼈를 깎는 정화 운동과 함께 많은 노력을 꾸준히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시선을 중국으로 돌려서 2회 분량으로 중국의 야구 역사와 발전, 그리고 앞으로의 가능성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대치동갈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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