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짝 한 번 눌러 주세요. 감사합니다.

국제대회에서 만나면 늘 한국과 끝장 승부를 펼치며 격전을 치르는 타이완 야구에 대해서 그저 우린 한국보다 약체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타이완 야구에 관해서 제대로 된 정보도 없고 막연하게나마 그저 약하지 않나? 라는 느낌만을 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국인 선교사에게서 야구를 전수받았고, 타이완은 일본인으로부터 야구를 배웠습니다. 그 차이가 별로 없을 것 같지만, 현재 타이완의 야구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어느 정도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한국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타이완 야구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그저 떠도는 풍문이나 낭설, 또는 근거 없는 소리가 난무한 현상이 많기에 10부작 기획 시리즈로 타이완의 야구역사와 그 발전사를 소개합니다. 

 각종 내용의 참조와 관련 사진 및 영상 자료는 타이완의 야후와 구글, 그리고 타이완야구 위키백과, 그리고 타이완 야구 100년사 동영상 등 여러 자료를 참조하였습니다.


타이완 프로야구 승부조작의 역사 두 번째 이야기


지난 포스팅에서 타이완 프로야구 승부조작의 처음부터 서술하였다면 이번에는 두 번째 파도인 블랙 베어스 사건과 블랙 웨일스 사건을 다루겠습니다.


블랙 베어스(黑熊事件) 사건이 있기 전인 2003년 10월에 모 언론에 보도된 불법 도박 조직 두목의 인터뷰 중에서 "중신 웨일스 애들이 가장 (포섭하기) 쉽고, 슝디 엘리펀츠 애들이 가장 (포섭하기) 어렵다." 라는 영상이 공개되면서 중신 웨일스 팀에게 조직적인 승부 조작의 의혹이 쏟아졌고 뒤를 이어 익명의 제보로 띠이진깡(第一金剛隊) 팀에서 중신으로 옮겨 온 쑤리웨이(蘇立偉)가 지목되면서 중신 구단은 검찰에 사건 수사 의뢰를 하였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쑤리웨이의 여자친구인 황씨가 쑤가 경기 중에 승부조작을 했다고 폭로하면서였습니다. 혐의를 받은 명단은 쑤리웨이와 린위에량(林岳亮)으로 검찰은 먼저 중신 구단의 사장을 불러 조사하기 시작했고 또다시 팀의 선수가 연루된 책임을 지고 감독인 린중치우(林仲秋)는 즉각 사퇴했습니다. *린중치우 감독은 1997년 8월 싼상 타이거스 선수로 있으면서 가오슝의 모 호텔에 흑도의 세력이 찾아와 린중치우 등 여러 명을 총으로 위협하며 폭력을 행사하고 승부조작에 가담하라는 위협을 받았던 장본인으로 승부조작이라면 아주 이를 갈던 사람이었습니다.


한신 시절 궈리졘푸 투구 모습의 야구카드/ 출처 ryosuke-takeuchi.com


 쑤리웨이는 조사를 받으면서 같은 장소에서 궈리지엔푸(郭李建夫)가 같은 주점에 있었다고 폭로했고, 궈리지엔푸는 나중에 그 장소에 간 일이 있다고 시인하였습니다. 그 일로 그는 돌연 은퇴를 선언하고 프로를 떠나 대학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이 밖에도 연루된 네 명의 선수 모두 계약 해지 혹은 자진 은퇴를 하며 사건을 일단락되었습니다. *궈리지엔푸는 'Tateo Kakuri'라는 이름으로 일본 한신 타이거스에서 6년 동안 27승 31패 3.50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활약한 스타 선수 출신으로 연루 의혹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사실 이때도 좀 더 깊게 파고들어 싹을 잘라야 했지만, 검찰은 쑤리웨이 한 사람의 혐의만 밝혀내고 나머지는 흐지부지되는 모습을 보이면서 또 승부조작의 생명이 살아날 수 있는 여지를 남겼습니다.


그 일이 있은 지 2년 만에 다시 타이완 프로야구계에 다시 승부조작의 혐의가 터지게 됩니다. 2005년 상반기 리그 경기 중에 라뉴 베어스와 싱농 불스간의 경기에서 사람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게 되는데, 우승을 바라보면 싱농 불스의 갑작스러운 연패가 계속되면서 상반기 우승의 기회가 날아가고, 여러 면에서 확률이 낮았던 청타이 코브라스가 우승을 차지하게 되면서 지난번의 갑작스러운 싱농의 4연속 패배가 집중적으로 여론에 의해 조명받게 됩니다.


그런 와중에 싱농의 도미니카 코치인 'Ted Martínez'와 피지컬 트레이너였던 'Luis Trinidad'가 돌연 사퇴를 하고 팀을 떠났고, 바로 외국인 투수였던 'Len Picota'도 제보가 있자 급히 사퇴하고 바로 파나마로 떠났습니다. 아무래도 승부 조작에 연루되었기에 그렇게 급히 떠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샀죠. 나중에 파나마 국적의 투수 렌 피코타는 다시 블랙 엘리펀츠 사건에 연루됩니다.


타이완 리버티 타임즈에 실린 승부조작 관계도/이미지 출처 libertytimes.com.tw


 그렇게 조사가 시작되어 2005년 7월 26일 경기에서 라뉴 베어스와 통이 라이언스 간의 경기 도중 천자오잉(陳昭穎)이 경찰에 의해 경기장에서 바로 체포 연행되었고, 청타이 코브라스 팀의 2군 코치 차이셩펑(蔡生豐)이 구속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일을 시작으로 많은 선수와 관계자가 경찰에 잡혔고, 또 검찰에 소환되었는데, 싱농 불스의 외국어 통역과 관계자 등 모두 22명의 전, 현직 선수와 구단 관계자가 체포되었습니다. 22명* 중에 아홉 명이 라뉴 베어스 소속이라서 이것을 '블랙 베어스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라뉴 베어스 9명, 청타이 코브라스 3명, 싱농 불스 5명, 슝디 엘리펀츠 2명, 중신 웨일스 2명, 前 싼상 타이거스 1명 ) 


2007년 3월 8일 타이중 지방법원은 연루선수 22명 중 외국인 선수인 Jonathan Hurst, Matt Beech, Harold Woodman 세 명은 향응 접대 혐의에 혐의없음 판결을 받았고, 호주 국적의 투수 Bradley Purcell은 오보로 밝혀졌고, 차이셩펑(蔡生豐)과 허지셴(何紀賢), 양런밍(楊仁明)등 세 명은 증거부족으로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그 외 나머지 16명은 각각 징역 6월형과 벌금 몇백만 원 정도의 약한 처벌 결과가 나와서 또 한 번 많은 팬에게 실망감을 안겨 줍니다. 


미흡한 처벌 등으로 원성을 산 지 불과 6개월도 안 되어서 타이완 프로야구계는 또다시 검은 그림자에 둘러싸이게 됩니다. 이번 사건의 특이점은 거물급 정치인과 연루되었다는 점입니다. 2007년 8월 23일 타이난 지검은 중신 웨일스 소속의 팀 주장 쩡한조우(曾漢州)와 왕이민(王宜民), 쉬런지에(許人介), 지쥔린(紀俊麟), 쑤저이(蘇哲毅) 등 다섯 명을 증인으로 소환합니다. 


원래는 타이완 국민당 타이난 현의 거물급 정치인인 우졘바오(吳健保)의 뇌물 수수와 각종 범죄 사실 혐의에 증인으로 대질하기 위함이었는데, 깊게 파고들다가 같이 걸려들게 되었습니다. 검찰은 조사 5일 후 쩡한조우와 지쥔린을 승부조작 혐의로 같이 구속합니다.  이 사건이 충격을 준 것은 불법 승부 조작의 정점에 거물급 정치인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두고 중신 웨일스를 이기고 지게 하는 것은 선수도, 코치나 감독, 야구단도 아닌 정치인이었다고 조롱했습니다.


2008년 마잉지우 現총통과 선거 현장에서 유세하는 장면의 우지엔바오(吳健保) 정치인/ 사진 애플뉴스


타이난 수이롄산장(水蓮山莊) 리조트에서 거물급 정치인과 범죄 조직 수괴와 프로야구 선수 등이 모여서 승부 조작을 모의하여 실행했다는 혐의입니다. 그중에서 주장인 쩡한조우는 구단 관리자로 지목되었습니다. 관리자란 그 구단에서 흑도 세력과 연계하여 승부조작을 모의하고 기획하고 실행하는 책임자급을 말합니다.


쩡한조우는 팀 동료 여러 명에게 한 사람당 30만 위안(현재 환율로 대략 1,050만 원) 정도를 주고 승부 조작에 가담시켰다는 혐의를 받았습니다. 쩡한조우와 지쥔린은 돈을 받았다고 인정했다가 나중에 진술을 번복했고, 나머지 세 명은 절대 돈을 수뢰하지 않았다고 완강히 버텼습니다. 


그러나 검찰 측의 발표 후 구단은 발 빠르게 일부 선수는 퇴출하고, 일부 선수에게 무기한 출전 정지를 시켰습니다. 이번에 연루된 사람들은 타이난 현의 싼화(善化) 초등학교 야구부 선, 후배 출신과 그 지역 출신의 정치계 및 경제계 사람들로 그 지역의 각계각층 인사로부터 많은 비호를 받아 왔습니다. 


이 일이 있었던 직후 리그를 중단하고 전방위적으로 조사를 시작해야 한다는 여론이 강해지자 프로야구 연맹은 단장 회의를 통해 성명을 내고 리그경기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슝디 엘리펀츠 구단의 단장 홍뤼허씨는 우리 팀에서 "만약 다섯 명 이상이 승부 조작에 연루된다는 난 즉시 팀을 해체할 것이다." 라고 승부 조작을 일삼는 세력과 선수들에게 강력한 경고성 멘트를 했습니다. 


아무튼, 6개월도 안 지나 또다시 승부 조작의 파문에 휩싸인 중신 웨일스(中信鯨) 팀이 해체할 것이라는 소문이 야구계를 강타했습니다. 그러나 중신 금융지주 회장 꾸롄송(辜濂松)은 해산하지 않을 것이라고 서둘러 소문을 진화했습니다. (다음 시리즈에서 나오겠지만, 미디어 티렉스 사건 이후 중신 웨일스는 결국 팀을 자진 해체했습니다.) 


그 후 9월 3일 CPBL 소속 6개 팀 대표가 톈무 야구장에서 모여 자중(自重), 자율(自律), 자애(自愛)라는 표어를 내걸고 자정 작업을 선포했고 슝디와 청타이 팀은 유니폼에 승부 조작에 항의하는 표시로 검은 리본을 달고 경기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슝디의 홍뤼허 단장은 승부조작을 한 선수가 속한 구단에게 연좌제로 1천만 위안(현 환율로 3억 5천만 원 정도)의 벌금을 부과하자는 건의를 했습니다. 


당시 애플신문 기사에 실린 우젠바오 조직의 승부조작 관계도입니다. 


며칠 후 9월 18일 체포된 불법도박 조직의 두목 조우홍저(周宏哲)와 리샤오쥔(黎紹君) 등 2명은 싱농 불스와 청타이 코브라스 팀 소속 선수에게 전화로 승부조작을 할 것을 지시했고 결국 한패가 되었다고 진술하였다고 말했는데, 싱농 팀의 류즈셩 단장은 자체 조사 결과 헛소문이었다고 강하게 반박했습니다.


2007년 10월 초 중신 웨일스 소속이던 10명의 타이완 국적 선수가 팀에서 쫓겨나면서 리그 경기가 어려워진 중신 웨일스 단장 린민쩡은 급히 2008년 은퇴 예정인 따이쉰(代訓* 대체복무 팀) 소속 선수 다섯 명을 영입하기로 하고, 다른 팀에게는 선수 수급을 위한 트레이드도 부탁하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2008년 타이난 지검은 범죄 단체와 결탁하여 블랙 웨일스 사건을 주도한 정치인 우졘바오(吳健保:타이완 국민당 타이난 현(顯) 의회 14~16대 의장 역임)에게 징역 6년, 前 중신 웨일스 소속 쩡창밍(鄭昌明), 황꾸이위(黃貴裕), 지쥔린(紀俊麟), 쩡한조우(曾漢州), 천지엔웨이(陳健偉) 등에게는 각각 징역 6월 형을 선고하였고 중신 웨일스는 얼마 안 가 미디어 티렉스 사건이 또 벌어지자 프로야구계에 환멸을 느끼며 2008년 11월 11일 팀을 자진 해산시켰습니다. 


당시 기사 보기

<속보>대만 중신 웨일스 팀 전격 해산 결정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춘 중신웨일스 (中信鯨隊) 프로 야구단 


총 13명의 선수가 직, 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옷을 벗거나 영구제명 당하였습니다. 그중에서 두 명은 라뉴 베어스 소속이고, 나머지 11명이 중신 웨일스 소속으로 이 사건을 '블랙 웨일스 사건'으로 부릅니다.  


2010년 타이난 지방법원은 1심에서 도박조직 뇌물공여죄, 뇌물수수죄, 뇌물성장려금 수뢰혐의 등으로 유죄를 선고 받은 다섯 명에게 증거부족 및 혐의없음 판결로 무죄를 선고하였고, 2011년 12월 13일 타이난 고등법원 2심 판결에서 역시 다섯 명의 선수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사실 증거부족일 수밖에 없는 것이 구단의 허술한 대처와 검, 경의 강력한 의지 없이 미흡한 법률상의 허점 등으로 끝까지 자세하게 밝혀낼 수 없었던 탓도 있고, 워낙 범죄 조직의 수법 등이 교묘하고 은밀하여 확실한 증거를 밝혀내기가 어려운 면도 있습니다. 승부 조작 모의를 위한 만남도 흑도와 선수들이 서로 입을 맞춰 고향 선, 후배며, 야구계의 선, 후배로서 모여 단순한 향응이었을 뿐이라고 우기면 약한 처벌만 받고 빠져나가기에 어쩔 수 없고, 뇌물도 현금으로 주고받아 계좌에 입금하지 않고 여자친구나 타인에게 맡기는 등으로 법망을 피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특단의 대책을 강구해야 하는 정부가 의지 미흡 등으로 법망 정비를 하지 않아서 고기가 다 그물망을 빠져나가는 것이 원인이라는 여론의 원성이 점점 높아졌습니다.


지금까지 블랙 이글스와 블랙 웨일스 사건을 정리했습니다. 지난 1편에 서술했던 승부조작 시기의 프로야구 관중 수의 추이가 2002년에 50만, 2003년에 90만 명으로 가파른 회복세를 보여 희망을 주었고 2004년과 2005년에 각각 105만과 102만으로 다시 인기의 부활조짐을 보이면서 예년의 활황세를 되찾았지만, 블랙 베어스와 블랙 웨일스 사건이 2년 사이에 연달아 터지면서 다시 프로야구의 관중 수는 급감하게 됩니다. 

2006년에 67만, 2007년에 61만, 2008년에는 57만 명으로 평균 한 경기당 2천 명(경기당 1,922명 수준)이 채 안 되는 두 번째 절망수준(첫 번째 절망수준은 1999년~2001년 3년 연속 경기당 평균 1,700명대 관중)으로 떨어졌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타이완 야구 100년사 - 제8 ③부 - 는 2008년, 2009년에 벌어진 블랙 미디어 사건과 블랙 엘리펀츠 사건을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블로그 이미지

대치동갈매기

중국과 타이완 야구에 대한 전문블로그입니다. 점차 발전하는 중화권 야구에 대한 정보를 모아 지피지기하는 마음으로 만들었습니다. 아무튼 많이 사랑해 주시면 좋겠네요.


 국제대회에서 만나면 늘 한국과 끝장 승부를 펼치며 격전을 치르는 타이완 야구에 대해서 그저 우린 한국보다 약체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타이완 야구에 관해서 제대로 된 정보도 없고 막연하게나마 그저 약하지 않나? 라는 느낌만을 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국인 선교사에게서 야구를 전수받았고, 타이완은 일본인으로부터 야구를 배웠습니다. 그 차이가 별로 없을 것 같지만, 현재 타이완의 야구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어느 정도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한국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타이완 야구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그저 떠도는 풍문이나 낭설, 또는 근거 없는 소리가 난무한 현상이 많기에 10부작 기획 시리즈로 타이완의 야구역사와 그 발전사를 소개합니다. 

 각종 내용의 참조와 관련 사진 및 영상 자료는 타이완의 야후와 구글, 그리고 타이완야구 위키백과, 그리고 타이완 야구 100년사 동영상 등 여러 자료를 참조하였습니다.


타이완 프로야구와 승부 조작의 역사 


타이완에서 처음 승부 조작 사건이 발생한 것은 명확하게 따지면 1995년에 최초로 발생한 '블랙 타이거스(黑虎事件) 사건'입니다. 


당시 프로야구계에 어둠의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조폭 조직이나 역사적으로 뿌리가 깊은 삼합회 등의 개입이 일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승부 조작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한참 타이완에서 프로야구의 인기가 올라가던 시기에 승부 조작이 터지면서 한껏 부풀어 오른 풍선의 바람이 다 빠지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중국이나 타이완의 중화권에서는 흑도의 세력이 자생을 위해 각종 이권에 개입하고 불법적인 일을 해가면서 조직의 운영비를 벌었는데, 그 중심에 마약과 인신매매와 불법 도박 등이 주축입니다. 몇천 년의 역사를 이어 온 흑도의 불법 도박 사업은 현재까지도 근절하기 어려운 검은 뿌리와도 같습니다.


 처음 밝혀진 승부 조작은 흑도(黑道)의 세력에 의해 선수가 협박을 받으면서 조작에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프로 야구가 인기가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도 흑도 세력이 각종 도박에 프로야구를 이용하기 시작했고, 그 수익이 생각만큼 크지 않자 선수와 관계자를 협박하여 의도하는 대로 결과를 만들려는 시도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흑도 세력에 의해 칼침 테러를 당한 故 쉬셩밍 감독이 병원에서 누운 채 인터뷰하는 장면


 1995년에 '블랙 타이거스(黑虎事件)'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어릴 때부터 같이 운동을 했던 선수들이 파벌을 엮어 서로 봐주거나 밀어주는 형태의 경기 조작이 차후에 흑도의 개입으로 발전한 케이스였습니다. 초창기 네 팀 중에 두 팀(웨이취엔, 슝디)은 아마추어 야구단을 가지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프로화가 된 케이스고 통이는 타이디엔(台電隊) 야구팀을 주축으로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싼상 타이거스팀은 다른 세 팀보다 늦게 프로팀을 창단하면서 여러 선수를 끌어모아서 만든 팀이었습니다. 


그 안에 여러 파벌이 있었는데, 이런 파벌 알력 다툼이 심해지고 거기에 약점을 파악한 흑도가 조작을 위해 개입하게 되면서 점차 승부조작으로 발전한 케이스입니다. 

1995년 10월 14일에 최종전 네 게임을 남겨 놓은 상황에서 싼상 타이거스팀은 4연승을 하면 후반기리그 우승을 차지할 수 있는 경기에서 선발이 고의사구를 남발하며 패배하게 되었던 경기가 조작으로 밝혀졌습니다. 그 후 1996년 싼상팀과 웨이취엔팀의 경기 중에 싼상 팀의 후원회장이 경기에 조작이 있었다는 폭로 대자보를 붙이면서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그 후에 일본인 감독인 Takuwa Motoji(宅和本司)와 외국인 선수 네 명(Jose de Jesus, Kevin Dattola, Steve Curry, Chad Devereux)를 포함한 총 14명의 흑도와 연관된 선수들이 팀을 떠났습니다. 그 조사를 하면서 더 깊게 들어가니까 또 다른 승부조작 사건이 밝혀지면서 본격적인, 그러니까 최초의 외부 개입으로 일어나게 된 승부조작 사건으로 연결됩니다. 이것이 바로 1996년 6월에 벌어진 블랙 이글스(黑鷹事件) 사건입니다.  


본격적으로 승부 조작을 하는 방식은 흑도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선수와 관계자를 위협 또른 금전 및 미인계로 유혹하여 넘어오게 한 후에 그 선수를 이용해서 고의로 경기를 망치거나 조작하게 하여 불법 도박판을 구성하는 것인데 검찰에서 블랙 타이거스 사건에 냄새를 맡고 추적하던 중에 다른 줄기를 파헤친 사건으로 수십 명의 전, 현직 선수와 관계자가 걸려 들었습니다. 


 흑도 세력은 1996년 6월 12일부터 얼마 전 세상을 떠난 故 쉬셩밍(徐生明) 씨(한국에 유학을 와서 실업야구팀 한국 화장품에서 투수 생활을 하며 좋은 활약을 펼쳤던 선수 출신으로 타이완의 거두 야구인인 그는 작년에 싱농 불스를 이어 받은 신생팀 이따 라이노스의 감독직을 맡아 전반기 리그 우승을 하는 등 좋은 성적을 올렸으나 후반기를 앞두고 동네 산책을 하다 심근경색으로 쓰러져서 결국 사망하였다.)가 당시 웨이취엔 드레건스의 감독이었는데 승부조작을 하라는 협박을 받았던 일을 시작으로 전방위적인 위협을 가해 왔습니다. 


 그 해 8월에는 슝디 엘리펀츠가 연승을 달리며 기세를 올리고 있을 때 천의신(陳義信), 홍이중(洪一中), 리원촨(李文傳), 천이송(陳逸松), 우푸롄(吳復連) 등의 선수에게 흑도 세력이 호텔로 찾아와서 접근하며 구타 등을 하면서 경기 조작을 하라는 위협을 받았습니다. 구단은 경찰에 신고하였고 이 사건이 흑도 세력이 공개적으로 위협을 한 것으로 밝혀진 첫 사례가 되었습니다. 


 이후부터 실탄을 장착한 경찰력이 야구장에 투입되어 선수와 관계자를 호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에 8월 타이베이 지검에 프로야구 불법 승부조작 사건 전담반이 만들어졌고 검찰관이 투입되어 조사가 시작되었고, 열흘 후에 스바오 이글스팀의 전직 선수였던 청쩡슝(曾政雄)과 불법 도박회사의 수뇌가 승부조작 및 불법도박 혐의로 체포되었습니다. 


 그 후에 10월과 11월에 걸쳐 열린 그 해 프로야구 챔피언 시리즈에 승부 조작이 있었다는 루머가 돌았고, 검찰은 계속 자세히 조사를 하여 결국 1997년 1월에 1차 발표를 하여 허신 웨일스 팀의 선수인 양장신(楊章鑫)을 체포하였습니다. 


웨이취안 드레곤즈의 해산 발표가 실린 당시의 신문 기사/사진 출처 等一個晴天


前 선수 등이 인맥 등을 이용하여 흑도와 결탁해 현직 선수를 위협, 유혹하는 방식인데 그 중심 인물을 체포하였고, 그 사건을 필두로 하여 1997년 9월 10일 최종 결과까지 모두 39명의 전, 현직 선수와 관계자가 체포되었습니다. 그중에 23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고, 두 명은 무죄 확정되었습니다. 


아무튼, 이 사건의 여파로 인해 결국 1998년 9월에 스바오 이글스(時報鷹)팀이 처음으로 팀 해산을 결정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스바오 이글스팀에만 무려 19명의 선수가 체포되어 도저히 운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해산을 결정한 것도 있고, 더 이상의 수익을 위한 팀 운영이 어려워서도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시의 사건 영상을 故 쉬셩밍 감독이 별세한 후에 민스티비 채널에서 회고하면서 올린 자료입니다. 


그로부터 1년 후 1999년 4월 26일에는 웨이취엔 드레건스의 감독이었던 故 쉬셩밍 씨가 아침에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고 오는 길에서 흑도의 괴한들에게 테러를 당해 허벅지와 둔부에 자상을 입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승부조작의 협박을 거절하였다고 테러를 가한 사건인데 이때 정말 타이완 전역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흑도에 의한 선수 협박 및 테러 사건 사례

-흑도 세력이 호텔로 찾아와 슝디 엘리펀츠 선수 다섯 명에게 위협을 가하면서 경기에서 고의로 조작을 할 것을 위협하였고, 그 중 우푸롄 선수는 권총 손잡이 자루에 머리를 맞아 부상을 당했다.

-1997년 8월 3일 싼상 타이거즈 선수 7명(외국인 선수 네 명 포함:Keith Gordon, David Tokheim, Lino Rivera, Cris Colón)에게 흑도 세력이 찾아와 위협을 가하면서 8월 2일 싼상 타이거즈와 스바오 이글스 경기에서 지는 바람에 3천만 위안을 잃어버렸다고 다음 경기에서 조작할 것을 위협하였고 경찰에 조사 의뢰. 이후 두 명의 외국인 선수(Keith Gordon, David Tokheim)는 남은 급여 등을 포기하고 바로 타이완을 떠났다.

-고 쉬셩밍 감독에게 승부조작을 강요하다 안 되니까 흑도 세력 두 명이 쉬감독에게 길거리에서 네 차례의 칼침을 놓은 사건으로 허벅지와 엉덩이에 자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였다.

위의 사례는 공식적으로 밝혀진 사례로 비공식적인 사례는 루머 포함하여 매우 많기에 여기 적지 않겠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계속된 검찰의 조사에 다시 여러 명의 관련자가 체포되면서 2차로 충격을 주었고, 그런 여파로 인해 결국 1999년 11월 8일 싼상 타이거즈(三商虎隊)가 해체되었고, 그 뒤를 이어 1999년 12월 13일에는 결국 웨이취엔 드레건스(味全龍隊)도 팀 해체를 선언하였습니다. 


블랙 이글스 사건 2심에서 감형이 된 소식을 전한 TV 뉴스 속보/TVBS뉴스화면


 블랙 이글스 사건의 고등법원 최종심에서의 판결은 2004년 12월 31일 32명의 피고 중 23명의 선수에게 1년 10월~1년 7월의 징역형을 내렸고, 승부조작의 혐의가 있어 수사를 받던 예쥔장(葉君璋), 장타이산(張泰山) 등 27명의 선수는 혐의없음의 불기소처분을 받고 공백없이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프로야구판을 완전히 뒤흔들어 팀 해체까지 불러온 사건치고는 이해하기 어려운 미미한 처벌로 인해 프로야구를 사랑하는 많은 팬들이 실망한 것은 물론이고 흑도 세력에 의해 다시금 승부 조작이 가능하다고 믿게 한 불씨를 남겨 놓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여파로 프로야구에 쏠리던 관심이 급격히 사그라지면서 프로야구 관중 수에서도 타격이 컸습니다.


1996년 136만 명의 관중이 찾아오면서 뜨거운 인기를 반영했으나 승부조작이 발각된 후인 1997년부터 68만 명으로 전년대비 무려 55.12%가 줄더니 1998년 69만 명, 1999년 49만 명으로 줄다가 2000년에는 결국 겨우 30만 명만 들어와서 4년 만에 무려 100만 명의 관중이 빠져나가는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1995년부터 1997년까지 1, 2차로 벌어진 승부 조작 관련 처리가 미흡하여 2003년 제3차 프로야구 승부조작 사건 재발의 빌미를 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타이완 야구 100년사 - 제8편 ①부 - 는 여기서 마칩니다. 

타이완 야구 100년사 - 제8편 ②부 - 는 2003년부터 2007년까지 벌어진 블랙 베어스와 블렉 웨일스 사건.

타이완 야구 100년사 - 제8 ③부 - 는 2008년과 2009년에 벌어진 블랙 미디어사건과 블랙 엘리펀츠 사건.

을 설명하면서 이번 제8편을 정리하겠습니다.  



*아~아래 손가락 한번 눌러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블로그 이미지

대치동갈매기

중국과 타이완 야구에 대한 전문블로그입니다. 점차 발전하는 중화권 야구에 대한 정보를 모아 지피지기하는 마음으로 만들었습니다. 아무튼 많이 사랑해 주시면 좋겠네요.

 
국제대회에서 만나면 늘 한국과 끝장 승부를 펼치며 격전을 치르는 타이완 야구에 대해서 그저 우린 한국보다 약체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타이완 야구에 관해서 제대로 된 정보도 없고 막연하게나마 그저 약하지 않나? 라는 느낌만을 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국인 선교사에게서 야구를 전수받았고, 타이완은 일본인으로부터 야구를 배웠습니다. 

 그 차이가 별로 없을 것 같지만, 현재 타이완의 야구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어느 정도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한국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타이완 야구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그저 떠도는 풍문이나 낭설, 또는 근거 없는 소리가 난무한 현상이 많기에 10부작 기획 시리즈로 타이완의 야구역사와 그 발전사를 소개합니다. 

 각종 내용의 참조와 관련 사진 및 영상 자료는 타이완의 야후와 구글, 그리고 타이완야구 위키백과, 그리고 타이완 야구 100년사 동영상 등 여러 자료를 참조하였습니다.



지난 편에 이어서 계속 하겠습니다. 지난 편에서는 양대리그의 경쟁까지를 알아봤었는데 이번  편에서는 그 양대리그의 합병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CPBL&TML 양대리그 합병 기자회견/연합보 뉴스 사진

양대리그 통합 합병 협의서


타이완의 프로 야구사에서 TML(Taiwan Major League)의 성립은 야구계에 좋은 기류를 가져다 주었습니다만 비슷한 리그가 두개가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어느 한쪽은 도태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습니다. 좁은 국토에 2,300만 가까이의 인구 수로는 큰 시장을 형성할 수 없었고, 운영을 잘 못하는 한쪽은 도태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었습니다. 


관중 수나 상업적인 판매 등에서 인기가 떨어지는 쪽은 손실이 막대하여 경영이 어려워 질 수밖에 없는 시장 규모와 현실로 둘로 나뉘어진 시장을 두고 프로야구계는 많은 고민을 합니다.


2003년 1월 13일 행정원의 체육위 주관부서의 주 위원인 린더푸(林德福)가 CPBL 연맹과 TML 연맹의 대표 7인(당시 CPBL 연맹회장인 천허동(陳河東), 통이기업(統一企業)의 린창셩(林蒼生) 회장, 슝디구단(兄弟象隊)의 홍뤼허(洪瑞河) 회장, 싱농그룹(興農集團)의 양티엔파(楊天發) 회장, 중국신탁(中國信託)의 린보이(林博義) 회장, 나루완주식회사(那魯灣股份有限公司)의 천성티엔(陳盛沺) 회장, 니엔다이방송국(年代電視台)의 치우푸셩(邱復生) 회장 등)을 소집하여 합병에 대하여 논의를 하였고 결국 천수이비옌(陳水扁) 총통의 직접 입회하에 양대 리그의 수장들이 리그통합 합병협의서에 서명을 하였습니다.

합병을 알리는 신문뉴스 제목


그리고 나루완 주식회사의 동의 하에 TML을 해산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4개 구단이던 TML을 2개 구단으로 통합시켰습니다. 남은 띠이진깡(第一金剛) 팀과 타이양(太陽) 팀은 CPBL로 가입시켰습니다. 그래서 정식으로 두 연맹이 통합되고 명칭은 CPBL로 통합되었습니다.


2003년(프로야구 14년) 3월 1일에 통합리그가 정식으로 타이베이의 티엔무 야구장에서 거행되었습니다.  당시 만 여 명의 관중들로 꽉 찬 개막전은 천 총통의 시구를 시작으로 새로운 타이완의 프로야구로서의 신기원을 열었습니다.

2004년에 청타이 은행이 타이양 팀을 흡수하여 팀 명을 코브라로 개명하였습니다. 그리고 라뉴 기업이 진깡 팀을 인수하여 라뉴 베어즈로 개명하였습니다.


타이완의 프로야구 역사 연대표를 만들었습니다. 아래 첨부하는 이미지를 보시면 연대 순으로 타이완의 

프로야구 역사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큰 이미지로 보시면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올림픽 열기를 프로야구 판으로


2004년 타이완 성인야구 대표팀은 그리스 아테네 올림픽 참가자격을 위한 예선전(일본 삿뽀로에서 열린 제 22회 아시아야구선수권 대회)에서 중국을 3:1로, 그리고 그들의 가장 큰 목표였던 한국을 5:4로 이기면서 아시아 지역 2위까지 주어지는 올림픽 야구 출전권을 따내었습니다. 실로 타이완이란 나라가 들썩할만한 쾌거를 이루었다고 연일 신문과 언론에서는 난리였습니다.

이것은 타이완 야구 대표팀이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이후에 무려 12년 만에 다시 올림픽 무대를 밟게되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이 타이완에서는 승부조작 사건 등으로 몰락해버린 야구의 인기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계기를 만든 중요한 터닝 포인트였습니다. 또한 이 올림픽 출전권을 획득하면서 타이완 전역에 야구 열기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붐을 조성하게 되었습니다.


기대를 안고 출전한 아테네 올림픽에서 타이완 대표팀은 연일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당당하게 5위라는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비록 4강에는 들지 못하였습니다만 중요한 일본과의 경기에서 뼈아픈 패배지만 좋은 경기를 보여주면서 희망을 가지게 했습니다. 


이날 경기는 먼저 일본의 에이스인 우에하라 선수로부터 천진펑(陳金鋒)이 3점 홈런을 쏘아 올리며 3:0으로 이기고 있었는데, 일본의 타카하시 요시노부의 활약으로 결국에는 4:3 역전패를 당하면서 지켜보던 타이완 국민들에게 많은 안타까움을 주었습니다. 이 경기에서 미국으로 진출한 3인방(콜로라도 록키즈의 차오진후이와 LA 다저스의 천진펑, 그리고 뉴욕 양키즈의 왕지엔민)이 활약을 하면서 타이완 국민들에게 많은 자부심을 심어 주었습니다.


(차오진후이의 강속구로 159km/h를 기록한 장면.)


당시 왕지엔민이 선발로 나와 7회까지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위력을 과시하였고, 뒤를 이어 나온 차오진후이가 경기 중에 162km/h가 나왔다고 했는데, 실제 경기 영상에는 159km/h(이 선수의 평속이나 구위를 볼 때 162km/h까지는 안 나오는 투수입니다. 156km/h정도가 가장 빠른 구속이라고 알고 있는데, 당시 올림픽 중계화면에 159km/h라고 뜨기는 떴습니다만 스피드건의 조작 미스나, 또는 구장의 환경이나 바람, 고도 등의 요소로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무튼, 그 기록은 역시 정식으로 인정되지는 않았습니다.)의 강속구를 던졌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고, 역시 미국에 진출한 천진펑 선수가 우에하라에게서 통쾌한 홈런을 뽑아내면서 일약 국민적인 영웅으로 떠올랐습니다.

 
  (아테네 올림픽에서 일본 에이스 우에하라로부터 3점 홈런을 뽑아낸 천진펑 선수: 5분50초부터)


타이완야구 100년사 제 7편 종료.

다음 제 8편에서는 프로야구의 흥망성쇠(興亡盛衰) 중에 주로 망과 쇠편이 되겠습니다. 불법적인 승부 조작과 화이트 글러브 사건, 그리고 도박 세력과의 연계로 점점 수렁에 빠지는 타이완 프로야구계의 현실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2014년 1월 13일 지난 7편까지를 재편집하면서 타이완 야구 100년의 역사 시리즈가 7편까지 적은 후 한참을 손을 놓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다음 8편은 조만간 정리해서 업데이트 하겠습니다. 사실 8편의 내용이 많아서 한텀 쉬어가려고 했던 것인데, 귀차니즘이 발동되어 쭈욱 쉬었습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블로그 이미지

대치동갈매기

중국과 타이완 야구에 대한 전문블로그입니다. 점차 발전하는 중화권 야구에 대한 정보를 모아 지피지기하는 마음으로 만들었습니다. 아무튼 많이 사랑해 주시면 좋겠네요.

 국제대회에서 만나면 늘 한국과 끝장 승부를 펼치며 격전을 치르는 타이완 야구에 대해서 그저 우린 한국보다 약체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타이완 야구에 관해서 제대로 된 정보도 없고 막연하게나마 그저 약하지 않나? 라는 느낌만을 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국인 선교사에게서 야구를 전수받았고, 타이완은 일본인으로부터 야구를 배웠습니다. 

 그 차이가 별로 없을 것 같지만, 현재 타이완의 야구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어느 정도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한국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타이완 야구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그저 떠도는 풍문이나 낭설, 또는 근거 없는 소리가 난무한 현상이 많기에 10부작 기획 시리즈로 타이완의 야구역사와 그 발전사를 소개합니다. 

 각종 내용의 참조와 관련 사진 및 영상 자료는 타이완의 야후와 구글, 그리고 타이완야구 위키백과, 그리고 타이완 야구 100년사 동영상 등 여러 자료를 참조하였습니다.


화롄 원주민(蓮原住民)의 가오샤 야구단(高砂棒球隊)

 

화롄 지역의 위치도


가오샤(高砂야구단은 타이완 동부 최고의 팀이었습니다타이완야구 사상 아주 중요한 팀중의 하나 입니다. 가오샤(高砂)라는 말의 어원은 일본 전국시대 덕천 막부시절의 타이완을 부르던 고어(古語)입니다. 타이완의 원주민을 가오샤족(高砂族)이라고 칭하면서 나온 말인데, 당시의 일본인들은 지금의 타이완을 가오샤국(高砂國)이라고 불렀습니다. 

 뒤에 남양에서 일본군과 싸우던 의용군을 가오샤 의용군(高砂義勇軍)이라고 부르기도 했었지요. 아무튼 이 가오샤라는 뜻은 타이완을 뜻하는 아름다운 섬이라는 말입니다.


 1
921년 야구에 푹빠진 선생님 린꾸이위(林桂興)가 타이베이에서 임시교사로 재직하던 당시 3학교에서 야구부를 맡아서 지도한 적이 있었고, 나중에 화롄지역으로 발령을 받아서 가보니 그 지역에는 아직 야구부가 없는 것을 발견하고는 부근의 원주민 소년들을 모아 테스트를 해 봤는데 그 지역 원주민 아이들 중의 한 (차우마:屋馬)이 기타 지역의 아이들보다 훨씬 빠르고 강한 공을 던지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그 공을 받아 줄 포수가 없어서 애태우다가 아예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돌아다니면서 적합한 인물을 찾았는데 이름이 꾸마오더(辜茂得)라는 친구였습니다.



<예전의 가오샤 야구단(高砂棒球隊) 모습>

린꾸이위(林桂興)는 그 두 소년을 주축으로 그곳의 원주민 아이들을 규합하여 가오샤 야구단(高砂棒球隊)만들었습니다. 그 지역에는 당시 일본인들이 대규모로 이주하여 2차 세계대전이 끝날때까지 화롄의 농업을 독점하였습니다. 수많은 일본인 거주민들이 야구팀을 만들어 즐겼는데, 그 야구팀들과 화롄지역의 화강산(花岡山) 야구장에서 연습시합을 하였는데, 이 팀이 바로 타이완 최초의 원주민 야구팀인 가오샤(高砂)야구단입니다.




 <화강산(花岡山) 야구장이 있던 곳

당시 일본인 梅野淸가 타이완 동부지역에 철도 공정과 화롄항 개발 공정, 그리고 임해도로 건설 등의 3대 대 공정을 위하여 화롄 지역에 도착하여, 당시 화롄 지역 청장이던 일본인 江口良郞과 더불어 그 지역 원주민들의 모반이나 난동을 염려하여 그들에게 기초적인 학습과 장기적으로 원활한 치안 유지 등을 위하여 학교를 세운 것이 '화롄항 농업보습학교(花蓮港 農業 補習學校)'인데 우선적으로 먼저 가오샤야구단의 선수들을 편입시켜 능가오산(能高山)이라는 이름으로 1923년 정식으로 야구단을 창단한 것이 '능가오퇀(能高團)'이고, 이 팀이 타이완야구의 역사상 아주 중요한 팀 중의 하나가 됩니다.  



                       <화련항[화롄깡지에(花蓮港街)] 1933년도 모습>


전후(戰後)시기의 타이완 야구(1945~1960년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으로 타이완이 광복되고 부터 1960년대의 사이에 야구는 우선 매우 어려웠던 시기였지만, 먹고 살기 힘든데 뭔 소리냐? 하던 시기가 한국에도 있었지만 종전 후의 생활상은 한국이나 타이완이나 비슷하였으나 타이완만인들에게 야구는 더 밀착되어서 종전 후의 어려운 이 시기에도 배부터 채우고나서 야구부터 본다라는 뜻으로 자주 쓰이던 말이 타이완 원주민어(민난어)까바오칸예치우(?飽看野球)',중국어는츠바오칸빵치우(吃飽看棒球: 배를 채우고 야구부터 본다)' 란 말의 뜻입니다








 <당시 창단된 여러 야구 팀들의 모습> 

이 시기에는 비교적 중요한 시합과 대회가 연속적으로 열리고 또한 전국적으로 큰 대회가 개최되곤 했습니다. 예를 들면


- 전국운동회(全國運動會)

- 성급야구대회(省運棒球賽)

- 타이베이시장배 연식야구대회(台北市市長杯軟式棒球賽)

- 타이베이시은행주최야구대회(台北市銀行公會棒球賽)

- 전국화은금상장야구대회(華銀金像奬棒球賽)

- 전국협회배(協會杯)금상장배야구대회

  (금상장이란 '어워드',혹은 '그랑프리'라고 보시면 됩니다.) 
- 국가주석(主席杯)야구대회


등 수많은 대회가 열리는 시기였고 각 지역에서 야구팀[예를 들면(석탄팀;石炭隊), (타이디엔:타이완 전력팀;台電隊),(허쿠:합동금고팀;合庫棒球隊),(탕창;설탕공장팀;糖廠棒球隊),(티에루쥐;철도국팀;鐵路局棒球隊), 타이완 담배 주류 공매국팀;台灣省酒公賣局棒球隊), (따량팀;大凉隊), (티엔샹웨이바오팀;天香味寶隊), 삼군(육해공)야구단(三軍棒球隊)] 등이 창단 되었고 그 열기 또한 전국에 우후죽순처럼 퍼져나갔고 성원이 대단했던 시기였습니다.



                  <성급 운동회(한국으로 치면 전국체전 성격)의 야구 대회 모습> 



<성급운동회 야구장 입장권의 모습> 

이렇듯 이 시기에는 각종 공적으로나 민간쪽으로나 각종 야구 관련 사업등이 활발하게 같이 이루어지던 시기였습니다. 공적으로는 야구장을 건설하여 인프라를 구축하는 등의 사업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아마추어 야구로서의 여가 활동을 시작한 것이 이 시 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좁은 국토와 척박한 땅에서 국민적인 오락을 가져다 준 것이 바로 야구이고, 상대적으로 다른 운동에 비해서 국제적인 성과로 많이 올릴 수 있는 지금의 타이완 야구의 중시조같은 시절이었습니다. 이 때 생긴 많은 팀들이 꾸준하게 이어져 내려오면서 70년대의 타이완 야구가 국제적으로 위용을 과시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는 것이지요.


당시 한국은 축구가 최고의 인기였었고 야구는 아직 축구에 비해서는 미미하던 시기였지만 타이완은 철저하게도 일본의 속
이 되어버린 느낌이 많이 듭니다. 여러 가지 정신적으로도 점령국 일본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나라입니다. 지금도 타이완에 가면 당시의 어르신들 중에는 그 향수를 못잊는 분들이 많습니다.(직접 인터뷰도 하고 여러 가지 이전의 일본 점령 시절에 대해서도 물어본 결과로 판단했습니다.) 


아마도 한국보다 한참 오래인 반세기라는 점령 기간동안 일본의 세뇌화가 그만큼 더 깊이 파고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철저하게 일본화되었기 때문에 한국보다 좀 더 빨리 야구가 민간으로 착화되고 밀착된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 2부 완-


신고
블로그 이미지

대치동갈매기

중국과 타이완 야구에 대한 전문블로그입니다. 점차 발전하는 중화권 야구에 대한 정보를 모아 지피지기하는 마음으로 만들었습니다. 아무튼 많이 사랑해 주시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