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대회에서 만나면 늘 한국과 끝장 승부를 펼치며 격전을 치르는 타이완 야구에 대해서 그저 우린 한국보다 약체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타이완 야구에 관해서 제대로 된 정보도 없고 막연하게나마 그저 약하지 않나? 라는 느낌만을 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국인 선교사에게서 야구를 전수받았고, 타이완은 일본인으로부터 야구를 배웠습니다. 

 그 차이가 별로 없을 것 같지만, 현재 타이완의 야구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어느 정도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한국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타이완 야구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그저 떠도는 풍문이나 낭설, 또는 근거 없는 소리가 난무한 현상이 많기에 10부작 기획 시리즈로 타이완의 야구역사와 그 발전사를 소개합니다. 

 각종 내용의 참조와 관련 사진 및 영상 자료는 타이완의 야후와 구글, 그리고 타이완야구 위키백과, 그리고 타이완 야구 100년사 동영상 등 여러 자료를 참조하였습니다.


화롄 원주민(蓮原住民)의 가오샤 야구단(高砂棒球隊)

 

화롄 지역의 위치도


가오샤(高砂야구단은 타이완 동부 최고의 팀이었습니다타이완야구 사상 아주 중요한 팀중의 하나 입니다. 가오샤(高砂)라는 말의 어원은 일본 전국시대 덕천 막부시절의 타이완을 부르던 고어(古語)입니다. 타이완의 원주민을 가오샤족(高砂族)이라고 칭하면서 나온 말인데, 당시의 일본인들은 지금의 타이완을 가오샤국(高砂國)이라고 불렀습니다. 

 뒤에 남양에서 일본군과 싸우던 의용군을 가오샤 의용군(高砂義勇軍)이라고 부르기도 했었지요. 아무튼 이 가오샤라는 뜻은 타이완을 뜻하는 아름다운 섬이라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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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1년 야구에 푹빠진 선생님 린꾸이위(林桂興)가 타이베이에서 임시교사로 재직하던 당시 3학교에서 야구부를 맡아서 지도한 적이 있었고, 나중에 화롄지역으로 발령을 받아서 가보니 그 지역에는 아직 야구부가 없는 것을 발견하고는 부근의 원주민 소년들을 모아 테스트를 해 봤는데 그 지역 원주민 아이들 중의 한 (차우마:屋馬)이 기타 지역의 아이들보다 훨씬 빠르고 강한 공을 던지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그 공을 받아 줄 포수가 없어서 애태우다가 아예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돌아다니면서 적합한 인물을 찾았는데 이름이 꾸마오더(辜茂得)라는 친구였습니다.



<예전의 가오샤 야구단(高砂棒球隊) 모습>

린꾸이위(林桂興)는 그 두 소년을 주축으로 그곳의 원주민 아이들을 규합하여 가오샤 야구단(高砂棒球隊)만들었습니다. 그 지역에는 당시 일본인들이 대규모로 이주하여 2차 세계대전이 끝날때까지 화롄의 농업을 독점하였습니다. 수많은 일본인 거주민들이 야구팀을 만들어 즐겼는데, 그 야구팀들과 화롄지역의 화강산(花岡山) 야구장에서 연습시합을 하였는데, 이 팀이 바로 타이완 최초의 원주민 야구팀인 가오샤(高砂)야구단입니다.




 <화강산(花岡山) 야구장이 있던 곳

당시 일본인 梅野淸가 타이완 동부지역에 철도 공정과 화롄항 개발 공정, 그리고 임해도로 건설 등의 3대 대 공정을 위하여 화롄 지역에 도착하여, 당시 화롄 지역 청장이던 일본인 江口良郞과 더불어 그 지역 원주민들의 모반이나 난동을 염려하여 그들에게 기초적인 학습과 장기적으로 원활한 치안 유지 등을 위하여 학교를 세운 것이 '화롄항 농업보습학교(花蓮港 農業 補習學校)'인데 우선적으로 먼저 가오샤야구단의 선수들을 편입시켜 능가오산(能高山)이라는 이름으로 1923년 정식으로 야구단을 창단한 것이 '능가오퇀(能高團)'이고, 이 팀이 타이완야구의 역사상 아주 중요한 팀 중의 하나가 됩니다.  



                       <화련항[화롄깡지에(花蓮港街)] 1933년도 모습>


전후(戰後)시기의 타이완 야구(1945~1960년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으로 타이완이 광복되고 부터 1960년대의 사이에 야구는 우선 매우 어려웠던 시기였지만, 먹고 살기 힘든데 뭔 소리냐? 하던 시기가 한국에도 있었지만 종전 후의 생활상은 한국이나 타이완이나 비슷하였으나 타이완만인들에게 야구는 더 밀착되어서 종전 후의 어려운 이 시기에도 배부터 채우고나서 야구부터 본다라는 뜻으로 자주 쓰이던 말이 타이완 원주민어(민난어)까바오칸예치우(?飽看野球)',중국어는츠바오칸빵치우(吃飽看棒球: 배를 채우고 야구부터 본다)' 란 말의 뜻입니다








 <당시 창단된 여러 야구 팀들의 모습> 

이 시기에는 비교적 중요한 시합과 대회가 연속적으로 열리고 또한 전국적으로 큰 대회가 개최되곤 했습니다. 예를 들면


- 전국운동회(全國運動會)

- 성급야구대회(省運棒球賽)

- 타이베이시장배 연식야구대회(台北市市長杯軟式棒球賽)

- 타이베이시은행주최야구대회(台北市銀行公會棒球賽)

- 전국화은금상장야구대회(華銀金像奬棒球賽)

- 전국협회배(協會杯)금상장배야구대회

  (금상장이란 '어워드',혹은 '그랑프리'라고 보시면 됩니다.) 
- 국가주석(主席杯)야구대회


등 수많은 대회가 열리는 시기였고 각 지역에서 야구팀[예를 들면(석탄팀;石炭隊), (타이디엔:타이완 전력팀;台電隊),(허쿠:합동금고팀;合庫棒球隊),(탕창;설탕공장팀;糖廠棒球隊),(티에루쥐;철도국팀;鐵路局棒球隊), 타이완 담배 주류 공매국팀;台灣省酒公賣局棒球隊), (따량팀;大凉隊), (티엔샹웨이바오팀;天香味寶隊), 삼군(육해공)야구단(三軍棒球隊)] 등이 창단 되었고 그 열기 또한 전국에 우후죽순처럼 퍼져나갔고 성원이 대단했던 시기였습니다.



                  <성급 운동회(한국으로 치면 전국체전 성격)의 야구 대회 모습> 



<성급운동회 야구장 입장권의 모습> 

이렇듯 이 시기에는 각종 공적으로나 민간쪽으로나 각종 야구 관련 사업등이 활발하게 같이 이루어지던 시기였습니다. 공적으로는 야구장을 건설하여 인프라를 구축하는 등의 사업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아마추어 야구로서의 여가 활동을 시작한 것이 이 시 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좁은 국토와 척박한 땅에서 국민적인 오락을 가져다 준 것이 바로 야구이고, 상대적으로 다른 운동에 비해서 국제적인 성과로 많이 올릴 수 있는 지금의 타이완 야구의 중시조같은 시절이었습니다. 이 때 생긴 많은 팀들이 꾸준하게 이어져 내려오면서 70년대의 타이완 야구가 국제적으로 위용을 과시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는 것이지요.


당시 한국은 축구가 최고의 인기였었고 야구는 아직 축구에 비해서는 미미하던 시기였지만 타이완은 철저하게도 일본의 속
이 되어버린 느낌이 많이 듭니다. 여러 가지 정신적으로도 점령국 일본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나라입니다. 지금도 타이완에 가면 당시의 어르신들 중에는 그 향수를 못잊는 분들이 많습니다.(직접 인터뷰도 하고 여러 가지 이전의 일본 점령 시절에 대해서도 물어본 결과로 판단했습니다.) 


아마도 한국보다 한참 오래인 반세기라는 점령 기간동안 일본의 세뇌화가 그만큼 더 깊이 파고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철저하게 일본화되었기 때문에 한국보다 좀 더 빨리 야구가 민간으로 착화되고 밀착된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 2부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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