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대회에서 만나면 늘 한국과 끝장 승부를 펼치며 격전을 치르는 타이완 야구에 대해서 그저 우린 한국보다 약체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타이완 야구에 관해서 제대로 된 정보도 없고 막연하게나마 그저 약하지 않나? 라는 느낌만을 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국인 선교사에게서 야구를 전수받았고, 타이완은 일본인으로부터 야구를 배웠습니다. 

 그 차이가 별로 없을 것 같지만, 현재 타이완의 야구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어느 정도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한국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타이완 야구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그저 떠도는 풍문이나 낭설, 또는 근거 없는 소리가 난무한 현상이 많기에 10부작 기획 시리즈로 타이완의 야구역사와 그 발전사를 소개합니다. 

 각종 내용의 참조와 관련 사진 및 영상 자료는 타이완의 야후와 구글, 그리고 타이완야구 위키백과, 그리고 타이완 야구 100년사 동영상 등 여러 자료를 참조하였습니다.



3관왕의 광풍이 몰아치던 시기


타이완의 리틀 야구가 세계대회에서 처음으로 패권을 거머진 후, 타이완에서는 리틀야구와 청소년야구가 지속적으로 국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이어가기 위하여 많은 투자와 엄청난 노력을 했고, 결국 그것이 나중에 여러 국제 대회에서의 좋은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미국 Williamsport, PA 야구장의 모습 /구글어스로 검색


1969년 진롱(金龍)야구팀이 윌리엄스포터(Williamsport) 배에서 우승한 후, 1996년까지 모두 17 차례나 우승하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타이완 청소년 야구팀은 1972년 또다시 이번엔 윌리엄스포터 시가 아니고 미국 게리(Gary:시카고 부근)시에서 처음으로 열린 세계 리틀야구 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였습니다. 리틀 야구보다 더 나이가 많은 청소년 야구 팀은 1974년 미국 로더데일에서 열린 대회에 처음 참가하게 되는데 리틀야구와 마찬가지로 1996년까지 모두 17회나 우승하는 결과를 보여줍니다.

타이완의 3급 야구팀(리틀 야구, 청소년 야구, 청년 야구를 3급이라고 함)은 모두 6번이나 3급 야구팀 동반 우승의 기염을 토하는데 1974년, 1977년, 1978년, 1988년, 1990년과 1991년까지 총 여섯 번입니다. 이 시기를 가리켜 타이완 야구 3관왕의 광풍시기라고 합니다. (1984년에는 서울에서 리틀야구 월드시리즈 챔피언쉽 대회가 열렸는데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제이슨 베리텍(보스톤 레드삭스)도 알타몬테 스프링스팀 소속으로 한국에 왔었죠. 그땐 몰랐겠죠? 나중에 유명한 메이져리거가 된다는것을...


장기 발전의 기초를 닦다.


이 시기야말로 타이완 야구계에 있어서 야구의 부흥기를 지나 전 세계에 타이완 야구가 무엇이다를 보여준 활황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의심할 수 없는 크레이지 모드였고 이런 결과들이 타이완 사람들에게 민족적인 자긍심과 기개를 떨치게 해 준 그야말로 야구 이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쾌감을 안겨다 준 르네상스 시기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중에 3급야구의 활황세가 
타이완에 야구의 기초를 확실히 닦아주었기에 나중에 성인야구에서 수많은 좋은 선수가 배출이 되고 자연스럽게 전체적인 기반이 튼튼해지는 결과를 가져왔고 타이완 야구가 세계에 그 실력을 과시한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성인 시기의 대만야구(1980년~1990년대)

신임야구협회장 옌샤오쟝(嚴孝章)(左)1981년 사진 聯合報

1980년~1990년대의 타이완 야구는 장기적으로 좋은 결과의 꽃을 피우기 위한 노력을 하던 시기입니다. 


당시 타이완의 성인 야구는 국내외의 정치적인 요소(1979년 1월 1일부로 미국이 타이완과의 외교관계를 끊었습니다. 이후에 중국; 당시 중공의 훼방으로 거의 모든 국제 대회에 타이완은 참가할 수 없게 됩니다)로 인해 몇 년간 모든 국제 대회에 참가하지 못합니다.

몇 년 후에 타이완 성인야구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옌샤오쟝(嚴孝章) 야구협회 이사장(아시아 야구연맹 부회장 역임)의 노력 끝에 정치적으로 얽힌 문제(중공과의 정치적인 문제는 국호의 사용 문제와 국기의 사용 문제를 놓고 대립각을 세웠던 일을 말합니다.)를 풀고 다시금 여러 국제 대회에 참가하기 시작했습니다.
 
1982년의 서울에서 열린 세계 베이스볼 월드컵(Baseball World Cup : 당시의 명칭은 세계야구 선수권대회)에서 
타이완 성인 야구 대표팀은 6승 3패의 전적으로 한국과 미국 일본에 뒤져 4위를 차지합니다. 당시 한국 팀은 8승 1패의 성적으로 우승하게 되는데, 여러분들이 다 기억하고 계시는 잠실 야구장에서 선발 선동렬 투수의 호투와 김재박 감독의 기막힌 개구리 번트의 성공과 한대화 선수의 통쾌한 역전 3점 홈런으로 결승에서 일본을 누르고 우승한 바로 그 대회입니다. 

이어 다음 해 열린 아시아 야구선수권 대회에서는 한국과 일본, 
타이완이 각각 5승 2패로 공동 우승을 차지하였는데, 일본을 꺾은 결과가 다음 LA올림픽 야구 출전권 획득이라는 수확을 안겨다줍니다. 그해 열린 대륙간컵에서 타이완 팀은 3등을 차지 하였습니다. 


이변인것은 야구 절대강국인 쿠바를 타이완이 13대 1로 이기는 파란을 몰고 왔던 대회이기도 하여 기억에 남습니다. 그리고 참가한 제23회 LA 올림픽에서는 동메달이라는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대만 대표팀/中央社 제공

같은 해에 열린 세계 야구선수권대회에서도 쿠바에 이어 은메달을 차지하였고,  1986년 네덜란드에서 거행된 세계야구 선수권대회에서도 동메달을 따냄으로서 타이완 성인야구의 전성기를 이어갔습니다. 

그 이후에도 1987년 아시아 야구선수권 대회 은메달로 올림픽 참가권을 따내어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참가하였으나 예선 3연패로 탈락하였고, 이후 1991년 중국에서 열린 아시아 야구 선수권대회에서는 은메달로 다시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출전권을 따내었습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처음 정식 종목으로 편입된 야구경기에서 
타이완 팀이 은메달을 따냄으로서 타이완 야구 최고의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기사에 은메달을 따고 돌아온 야구 대표팀에게 상금 등으로 모두 1억 1,550만 위엔(현재 환율로 환산하면 한국 돈 50억 가량으로 코치진과 선수단 포함하여 24명 규모로 일인당 약 2억 가량을 획득)을 주었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궈위엔즈(郭源治)의 투구모습 /사진 聯合報

이 당시 80~90년대에 활약하던 선수들이 바로 현재 각 팀의 코치나 감독 급으로 자라왔던 것입니다. 


그 당시 선수들의 면면을 돌아보면 궈리지엔푸(郭李建夫), 가오잉지에(高英傑), 리라이파(李來發), 궈위엔즈(郭源治), 궈타이위엔(郭泰源), 장승시웅(莊勝雄), 쉬성밍(徐生明), 린화웨이(林華韋), 황광치(黃廣琪), 리쥐밍(李居明), 뤼밍츠(呂明賜), 짜오쓰치앙(趙士強), 천이신(陳義信), 황핑양(黃平洋), 홍이중(洪一中), 쩡바이승(鄭百勝) 등의 야구인들입니다. 



이 선수들이 바로 타이완 야구의 절대 중흥기였던 3급 야구 시절에 활약하고 자라왔던 선수들이고, 타이완 야구의 보물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하지만 당시 타이완은 프로야구가 없었기에 이 선수들이 대부분 일본으로 진출하여 이후 우수한 타이완 야구 유망주들이 자국 리그에 몸담지 않고 해외 진출에의 꿈을 가지게 되는는 부작용 아닌 부작용도 생겨나게 되는 그런 시기였습니다.


                                           제 4부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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