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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야구 이야기/대만야구 100년사

[시리즈] 타이완 야구 100년의 역사 - 제3편 -

 국제대회에서 만나면 늘 한국과 끝장 승부를 펼치며 격전을 치르는 타이완 야구에 대해서 그저 우린 한국보다 약체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타이완 야구에 관해서 제대로 된 정보도 없고 막연하게나마 그저 약하지 않나? 라는 느낌만을 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국인 선교사에게서 야구를 전수받았고, 타이완은 일본인으로부터 야구를 배웠습니다. 

 그 차이가 별로 없을 것 같지만, 현재 타이완의 야구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어느 정도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한국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타이완 야구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그저 떠도는 풍문이나 낭설, 또는 근거 없는 소리가 난무한 현상이 많기에 10부작 기획 시리즈로 타이완의 야구역사와 그 발전사를 소개합니다. 

 각종 내용의 참조와 관련 사진 및 영상 자료는 타이완의 야후와 구글, 그리고 타이완야구 위키백과, 그리고 타이완 야구 100년사 동영상 등 여러 자료를 참조하였습니다.


전편에서 타이완의 야구가 국제대회에서의 입상을 계기로 수많은 각종 야구 대회가 생겨나고 많은 팀들이 창단하게 되면서 야구의 중흥기가 시작되는 기초를 다졌다는 내용이었고, 이번 3부는 그 중흥기에 꽃을 피운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3급 야구운동시기의 타이완 야구(1960년대~1980년대)

3급 야구란 어린이 야구, 청소년 야구, 청년 야구를 말합니다. 1970년대 타이완의 경제가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수출에 힘을 써서 경제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던 시기인데 그 시기와 맞물려서 3급 야구 또한 광풍이 불 정도로 활황이였습니다. 모든 사회계층이 야구 민족주의의 색채를 띄고 야구에 몰입하던, 그리고 그 야구에 열광하던 그런 시기였습니다.

홍예촨치(紅葉傳奇)

1968년 8월 타이동(台東)의 홍예 리틀 야구단 이야기입니다. 내방한 일본 리틀 야구단을 2전 전승으로 물리치고 타이완 민중에 민족적인 자존심을 가져다 준 스토리인데요 그걸 영화화해서 전 타이완 사람들에게 큰 기쁨의 광풍을 가져다 준 이야기였습니다.



The Red Leaf Legend(PIFF사진)


1999년에 재 각색하여 '紅葉傳奇(The Red Leaf Legend)'<-상세정보클릭란 이름으로 제 4회 부산 국제 영화제(PIFF)에 출품하기도 한 작품입니다. 관심있게 보신 분들이 있을테지요? 아쉽게도 전 못봤습니다만 보신 분들이 감상이 어떤지 말씀 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혹시 소장하고 계신 분이라도 있으시다면 꼭 좀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진롱출격(金龍出擊)

 1969년 금룡 소년야구팀(Golden Dragon little-league baseball team)은 원동(遠東)지구의 대표권을 획득하여 미국 어린이 야구연맹에서 주최하는 세계 어린이야구 대회-앞서 시리즈 1회에서도 소개하였던 윌리엄스 포터에서 거행된 제 23회 세계 리틀야구 챔피온쉽-에 참가하여 우승까지 하게 되면서, 비록 작은 규모의 국제대회이긴 하였으나 타이완 최초로 국제 대회 참가 사상 우승의 영예를 안게 된 것으로서, 타이완 야구계뿐만 아니라 전 타이완 사람들에게 커다란 기쁨과 민족적인 기개를 떨치게 한 영광으로 받아 들여지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로 인해 야구에 대한 열풍은 물론이고 동반하여 경제적인 시너지 효과까지 가져다 주는 전환기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당시 언론 기사를 보면 우승하고 귀국하는 금룡 소년 야구팀의 환영 행사에 무려 15만 명의 타이완 사람들이 나와서 환영했다고 합니다. 리틀 야구팀 환영일파가 15만이라니 참 대단하지요?


민족주의의 광풍이 불어오다.



타이완에서의 야구는 그냥 야구가 아닙니다. 야구에 민족적 역량을 대입하여 같이 숨쉬고 같이 움직이며 같이 느끼고 있는것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중공이 중국의 대표권을 얻게되고 그 여파로 인해 1971년에 타이완이 UN에서 퇴출이 되고부터 갑자기 각종 언론 미디어에서 민족주의를 결합한 내용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야구선수들이나 각 팀들이 모두 입을모아 '야구로 양키를 이기자'란 표현들이 흘러나오게 되었는데, 그런 맥락에서 이 당시의 타이완 야구계는 민족주의의 광풍 그 중심에 서서 분위기를 주도하였고 자연스럽게 국제대회에 참가하는 일도 많아지고 좋은 성적을 얻으면 민족의 영웅으로 부상하던 시기였습니다.


圖片簡述:中華金龍少棒隊榮歸。 拍攝日期:1969-09-08 所有人:聯合報提供  本照片由聯合報授權提供,因合約限制僅供站內使用,請勿任意轉貼;有需此照片者請逕洽聯合知識庫。

사진설명:금룡소년야구단 귀국환영일파

촬영시기:1969년 9월8일 소유권한:연합보제공





촬영시기:1969년 9월8일 소유권한:연합보제공


 

금룡팀의 세계리틀야구 우승기

세계대회 우승패


                           ©ARR 사진제공.


* 월리엄스 포터에 대한 이야기는 본 시리즈의 1편에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남 메이허(美和), 북 화싱(華興), 동 롱공(榮工)


리틀야구에서 우승한 직후에
타이완에서 엄청난 수의 어린이 야구단이 만들어지게 되고 국민적인 관심을 끌게되면서 자연스레 학생 야구가 관심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리틀야구, 청소년야구, 청년야구를 말하는게 3급 야구라고 했는데, 그 중심에 선 강팀이 소제목과도 같은 메이허 중학야구단과 타이베이 화싱야구단입니다. 


이 두 학교의 주축을 중심으로 그 후 많은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국내에서도 라이벌 관계 남 메이허, 북 화싱이라 불리던 양강체제를 이끌었습니다. 이 두학교는 자연스럽게 뒤에 원화 대학(文化大學)과 푸런 대학(輔仁大學)의 양강 체제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1971년에 이번 시리즈의 2편에서 언급되었던 화롄 지역에 롱공 야구단이 생기면서 남 메이허, 북 화싱, 동 롱공의 3강 체제로 3급 야구 중흥기 시대를 풍미했습니다.

메이허중학야구단/사진 타이완야후 제공



메이허중학야구단/사진 타이완야후 제공



화싱중학야구단/사진 聯合보 제공



학생야구의 열풍이 불어오던 시기인 제 3부에 대한 소개는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제 4부에서는 타이완 성인 야구의 중흥기였던 1980년대와 1990년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여러가지 기획들로 조금씩 제 생각보다는 업데이트가 늦어지고 있습니다. 게을러서 그런 것인데, 혹시나 다음 내용을 기다리고 계신 분이 있다면 정말 죄송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