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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대회에서 만나면 늘 한국과 끝장 승부를 펼치며 격전을 치르는 타이완 야구에 대해서 그저 우린 한국보다 약체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타이완 야구에 관해서 제대로 된 정보도 없고 막연하게나마 그저 약하지 않나? 라는 느낌만을 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국인 선교사에게서 야구를 전수받았고, 타이완은 일본인으로부터 야구를 배웠습니다. 그 차이가 별로 없을 것 같지만, 현재 타이완의 야구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어느 정도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한국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타이완 야구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그저 떠도는 풍문이나 낭설, 또는 근거 없는 소리가 난무한 현상이 많기에 10부작 기획 시리즈로 타이완의 야구역사와 그 발전사를 소개합니다. 

 각종 내용의 참조와 관련 사진 및 영상 자료는 타이완의 야후와 구글, 그리고 타이완야구 위키백과, 그리고 타이완 야구 100년사 동영상 등 여러 자료를 참조하였습니다.


타이완 프로야구 승부조작의 역사 두 번째 이야기


지난 포스팅에서 타이완 프로야구 승부조작의 처음부터 서술하였다면 이번에는 두 번째 파도인 블랙 베어스 사건과 블랙 웨일스 사건을 다루겠습니다.


블랙 베어스(黑熊事件) 사건이 있기 전인 2003년 10월에 모 언론에 보도된 불법 도박 조직 두목의 인터뷰 중에서 "중신 웨일스 애들이 가장 (포섭하기) 쉽고, 슝디 엘리펀츠 애들이 가장 (포섭하기) 어렵다." 라는 영상이 공개되면서 중신 웨일스 팀에게 조직적인 승부 조작의 의혹이 쏟아졌고 뒤를 이어 익명의 제보로 띠이진깡(第一金剛隊) 팀에서 중신으로 옮겨 온 쑤리웨이(蘇立偉)가 지목되면서 중신 구단은 검찰에 사건 수사 의뢰를 하였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쑤리웨이의 여자친구인 황씨가 쑤가 경기 중에 승부조작을 했다고 폭로하면서였습니다. 혐의를 받은 명단은 쑤리웨이와 린위에량(林岳亮)으로 검찰은 먼저 중신 구단의 사장을 불러 조사하기 시작했고 또다시 팀의 선수가 연루된 책임을 지고 감독인 린중치우(林仲秋)는 즉각 사퇴했습니다. *린중치우 감독은 1997년 8월 싼상 타이거스 선수로 있으면서 가오슝의 모 호텔에 흑도의 세력이 찾아와 린중치우 등 여러 명을 총으로 위협하며 폭력을 행사하고 승부조작에 가담하라는 위협을 받았던 장본인으로 승부조작이라면 아주 이를 갈던 사람이었습니다.


한신 시절 궈리졘푸 투구 모습의 야구카드/ 출처 ryosuke-takeuchi.com


 쑤리웨이는 조사를 받으면서 같은 장소에서 궈리지엔푸(郭李建夫)가 같은 주점에 있었다고 폭로했고, 궈리지엔푸는 나중에 그 장소에 간 일이 있다고 시인하였습니다. 그 일로 그는 돌연 은퇴를 선언하고 프로를 떠나 대학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이 밖에도 연루된 네 명의 선수 모두 계약 해지 혹은 자진 은퇴를 하며 사건을 일단락되었습니다. *궈리지엔푸는 'Tateo Kakuri'라는 이름으로 일본 한신 타이거스에서 6년 동안 27승 31패 3.50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활약한 스타 선수 출신으로 연루 의혹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사실 이때도 좀 더 깊게 파고들어 싹을 잘라야 했지만, 검찰은 쑤리웨이 한 사람의 혐의만 밝혀내고 나머지는 흐지부지되는 모습을 보이면서 또 승부조작의 생명이 살아날 수 있는 여지를 남겼습니다.


그 일이 있은 지 2년 만에 다시 타이완 프로야구계에 다시 승부조작의 혐의가 터지게 됩니다. 2005년 상반기 리그 경기 중에 라뉴 베어스와 싱농 불스간의 경기에서 사람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게 되는데, 우승을 바라보면 싱농 불스의 갑작스러운 연패가 계속되면서 상반기 우승의 기회가 날아가고, 여러 면에서 확률이 낮았던 청타이 코브라스가 우승을 차지하게 되면서 지난번의 갑작스러운 싱농의 4연속 패배가 집중적으로 여론에 의해 조명받게 됩니다.


그런 와중에 싱농의 도미니카 코치인 'Ted Martínez'와 피지컬 트레이너였던 'Luis Trinidad'가 돌연 사퇴를 하고 팀을 떠났고, 바로 외국인 투수였던 'Len Picota'도 제보가 있자 급히 사퇴하고 바로 파나마로 떠났습니다. 아무래도 승부 조작에 연루되었기에 그렇게 급히 떠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샀죠. 나중에 파나마 국적의 투수 렌 피코타는 다시 블랙 엘리펀츠 사건에 연루됩니다.


타이완 리버티 타임즈에 실린 승부조작 관계도/이미지 출처 libertytimes.com.tw


 그렇게 조사가 시작되어 2005년 7월 26일 경기에서 라뉴 베어스와 통이 라이언스 간의 경기 도중 천자오잉(陳昭穎)이 경찰에 의해 경기장에서 바로 체포 연행되었고, 청타이 코브라스 팀의 2군 코치 차이셩펑(蔡生豐)이 구속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일을 시작으로 많은 선수와 관계자가 경찰에 잡혔고, 또 검찰에 소환되었는데, 싱농 불스의 외국어 통역과 관계자 등 모두 22명의 전, 현직 선수와 구단 관계자가 체포되었습니다. 22명* 중에 아홉 명이 라뉴 베어스 소속이라서 이것을 '블랙 베어스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라뉴 베어스 9명, 청타이 코브라스 3명, 싱농 불스 5명, 슝디 엘리펀츠 2명, 중신 웨일스 2명, 前 싼상 타이거스 1명 ) 


2007년 3월 8일 타이중 지방법원은 연루선수 22명 중 외국인 선수인 Jonathan Hurst, Matt Beech, Harold Woodman 세 명은 향응 접대 혐의에 혐의없음 판결을 받았고, 호주 국적의 투수 Bradley Purcell은 오보로 밝혀졌고, 차이셩펑(蔡生豐)과 허지셴(何紀賢), 양런밍(楊仁明)등 세 명은 증거부족으로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그 외 나머지 16명은 각각 징역 6월형과 벌금 몇백만 원 정도의 약한 처벌 결과가 나와서 또 한 번 많은 팬에게 실망감을 안겨 줍니다. 


미흡한 처벌 등으로 원성을 산 지 불과 6개월도 안 되어서 타이완 프로야구계는 또다시 검은 그림자에 둘러싸이게 됩니다. 이번 사건의 특이점은 거물급 정치인과 연루되었다는 점입니다. 2007년 8월 23일 타이난 지검은 중신 웨일스 소속의 팀 주장 쩡한조우(曾漢州)와 왕이민(王宜民), 쉬런지에(許人介), 지쥔린(紀俊麟), 쑤저이(蘇哲毅) 등 다섯 명을 증인으로 소환합니다. 


원래는 타이완 국민당 타이난 현의 거물급 정치인인 우졘바오(吳健保)의 뇌물 수수와 각종 범죄 사실 혐의에 증인으로 대질하기 위함이었는데, 깊게 파고들다가 같이 걸려들게 되었습니다. 검찰은 조사 5일 후 쩡한조우와 지쥔린을 승부조작 혐의로 같이 구속합니다.  이 사건이 충격을 준 것은 불법 승부 조작의 정점에 거물급 정치인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두고 중신 웨일스를 이기고 지게 하는 것은 선수도, 코치나 감독, 야구단도 아닌 정치인이었다고 조롱했습니다.


2008년 마잉지우 現총통과 선거 현장에서 유세하는 장면의 우지엔바오(吳健保) 정치인/ 사진 애플뉴스


타이난 수이롄산장(水蓮山莊) 리조트에서 거물급 정치인과 범죄 조직 수괴와 프로야구 선수 등이 모여서 승부 조작을 모의하여 실행했다는 혐의입니다. 그중에서 주장인 쩡한조우는 구단 관리자로 지목되었습니다. 관리자란 그 구단에서 흑도 세력과 연계하여 승부조작을 모의하고 기획하고 실행하는 책임자급을 말합니다.


쩡한조우는 팀 동료 여러 명에게 한 사람당 30만 위안(현재 환율로 대략 1,050만 원) 정도를 주고 승부 조작에 가담시켰다는 혐의를 받았습니다. 쩡한조우와 지쥔린은 돈을 받았다고 인정했다가 나중에 진술을 번복했고, 나머지 세 명은 절대 돈을 수뢰하지 않았다고 완강히 버텼습니다. 


그러나 검찰 측의 발표 후 구단은 발 빠르게 일부 선수는 퇴출하고, 일부 선수에게 무기한 출전 정지를 시켰습니다. 이번에 연루된 사람들은 타이난 현의 싼화(善化) 초등학교 야구부 선, 후배 출신과 그 지역 출신의 정치계 및 경제계 사람들로 그 지역의 각계각층 인사로부터 많은 비호를 받아 왔습니다. 


이 일이 있었던 직후 리그를 중단하고 전방위적으로 조사를 시작해야 한다는 여론이 강해지자 프로야구 연맹은 단장 회의를 통해 성명을 내고 리그경기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슝디 엘리펀츠 구단의 단장 홍뤼허씨는 우리 팀에서 "만약 다섯 명 이상이 승부 조작에 연루된다는 난 즉시 팀을 해체할 것이다." 라고 승부 조작을 일삼는 세력과 선수들에게 강력한 경고성 멘트를 했습니다. 


아무튼, 6개월도 안 지나 또다시 승부 조작의 파문에 휩싸인 중신 웨일스(中信鯨) 팀이 해체할 것이라는 소문이 야구계를 강타했습니다. 그러나 중신 금융지주 회장 꾸롄송(辜濂松)은 해산하지 않을 것이라고 서둘러 소문을 진화했습니다. (다음 시리즈에서 나오겠지만, 미디어 티렉스 사건 이후 중신 웨일스는 결국 팀을 자진 해체했습니다.) 


그 후 9월 3일 CPBL 소속 6개 팀 대표가 톈무 야구장에서 모여 자중(自重), 자율(自律), 자애(自愛)라는 표어를 내걸고 자정 작업을 선포했고 슝디와 청타이 팀은 유니폼에 승부 조작에 항의하는 표시로 검은 리본을 달고 경기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슝디의 홍뤼허 단장은 승부조작을 한 선수가 속한 구단에게 연좌제로 1천만 위안(현 환율로 3억 5천만 원 정도)의 벌금을 부과하자는 건의를 했습니다. 


당시 애플신문 기사에 실린 우젠바오 조직의 승부조작 관계도입니다. 


며칠 후 9월 18일 체포된 불법도박 조직의 두목 조우홍저(周宏哲)와 리샤오쥔(黎紹君) 등 2명은 싱농 불스와 청타이 코브라스 팀 소속 선수에게 전화로 승부조작을 할 것을 지시했고 결국 한패가 되었다고 진술하였다고 말했는데, 싱농 팀의 류즈셩 단장은 자체 조사 결과 헛소문이었다고 강하게 반박했습니다.


2007년 10월 초 중신 웨일스 소속이던 10명의 타이완 국적 선수가 팀에서 쫓겨나면서 리그 경기가 어려워진 중신 웨일스 단장 린민쩡은 급히 2008년 은퇴 예정인 따이쉰(代訓* 대체복무 팀) 소속 선수 다섯 명을 영입하기로 하고, 다른 팀에게는 선수 수급을 위한 트레이드도 부탁하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2008년 타이난 지검은 범죄 단체와 결탁하여 블랙 웨일스 사건을 주도한 정치인 우졘바오(吳健保:타이완 국민당 타이난 현(顯) 의회 14~16대 의장 역임)에게 징역 6년, 前 중신 웨일스 소속 쩡창밍(鄭昌明), 황꾸이위(黃貴裕), 지쥔린(紀俊麟), 쩡한조우(曾漢州), 천지엔웨이(陳健偉) 등에게는 각각 징역 6월 형을 선고하였고 중신 웨일스는 얼마 안 가 미디어 티렉스 사건이 또 벌어지자 프로야구계에 환멸을 느끼며 2008년 11월 11일 팀을 자진 해산시켰습니다. 


당시 기사 보기

<속보>대만 중신 웨일스 팀 전격 해산 결정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춘 중신웨일스 (中信鯨隊) 프로 야구단 


총 13명의 선수가 직, 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옷을 벗거나 영구제명 당하였습니다. 그중에서 두 명은 라뉴 베어스 소속이고, 나머지 11명이 중신 웨일스 소속으로 이 사건을 '블랙 웨일스 사건'으로 부릅니다.  


2010년 타이난 지방법원은 1심에서 도박조직 뇌물공여죄, 뇌물수수죄, 뇌물성장려금 수뢰혐의 등으로 유죄를 선고 받은 다섯 명에게 증거부족 및 혐의없음 판결로 무죄를 선고하였고, 2011년 12월 13일 타이난 고등법원 2심 판결에서 역시 다섯 명의 선수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사실 증거부족일 수밖에 없는 것이 구단의 허술한 대처와 검, 경의 강력한 의지 없이 미흡한 법률상의 허점 등으로 끝까지 자세하게 밝혀낼 수 없었던 탓도 있고, 워낙 범죄 조직의 수법 등이 교묘하고 은밀하여 확실한 증거를 밝혀내기가 어려운 면도 있습니다. 승부 조작 모의를 위한 만남도 흑도와 선수들이 서로 입을 맞춰 고향 선, 후배며, 야구계의 선, 후배로서 모여 단순한 향응이었을 뿐이라고 우기면 약한 처벌만 받고 빠져나가기에 어쩔 수 없고, 뇌물도 현금으로 주고받아 계좌에 입금하지 않고 여자친구나 타인에게 맡기는 등으로 법망을 피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특단의 대책을 강구해야 하는 정부가 의지 미흡 등으로 법망 정비를 하지 않아서 고기가 다 그물망을 빠져나가는 것이 원인이라는 여론의 원성이 점점 높아졌습니다.


지금까지 블랙 이글스와 블랙 웨일스 사건을 정리했습니다. 지난 1편에 서술했던 승부조작 시기의 프로야구 관중 수의 추이가 2002년에 50만, 2003년에 90만 명으로 가파른 회복세를 보여 희망을 주었고 2004년과 2005년에 각각 105만과 102만으로 다시 인기의 부활조짐을 보이면서 예년의 활황세를 되찾았지만, 블랙 베어스와 블랙 웨일스 사건이 2년 사이에 연달아 터지면서 다시 프로야구의 관중 수는 급감하게 됩니다. 

2006년에 67만, 2007년에 61만, 2008년에는 57만 명으로 평균 한 경기당 2천 명(경기당 1,922명 수준)이 채 안 되는 두 번째 절망수준(첫 번째 절망수준은 1999년~2001년 3년 연속 경기당 평균 1,700명대 관중)으로 떨어졌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타이완 야구 100년사 - 제8 ③부 - 는 2008년, 2009년에 벌어진 블랙 미디어 사건과 블랙 엘리펀츠 사건을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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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타이완 야구에 대한 전문블로그입니다. 점차 발전하는 중화권 야구에 대한 정보를 모아 지피지기하는 마음으로 만들었습니다. 아무튼 많이 사랑해 주시면 좋겠네요.


 국제대회에서 만나면 늘 한국과 끝장 승부를 펼치며 격전을 치르는 타이완 야구에 대해서 그저 우린 한국보다 약체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타이완 야구에 관해서 제대로 된 정보도 없고 막연하게나마 그저 약하지 않나? 라는 느낌만을 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국인 선교사에게서 야구를 전수받았고, 타이완은 일본인으로부터 야구를 배웠습니다. 그 차이가 별로 없을 것 같지만, 현재 타이완의 야구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어느 정도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한국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타이완 야구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그저 떠도는 풍문이나 낭설, 또는 근거 없는 소리가 난무한 현상이 많기에 10부작 기획 시리즈로 타이완의 야구역사와 그 발전사를 소개합니다. 

 각종 내용의 참조와 관련 사진 및 영상 자료는 타이완의 야후와 구글, 그리고 타이완야구 위키백과, 그리고 타이완 야구 100년사 동영상 등 여러 자료를 참조하였습니다.


타이완 프로야구와 승부 조작의 역사 


타이완에서 처음 승부 조작 사건이 발생한 것은 명확하게 따지면 1995년에 최초로 발생한 '블랙 타이거스(黑虎事件) 사건'입니다. 


당시 프로야구계에 어둠의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조폭 조직이나 역사적으로 뿌리가 깊은 삼합회 등의 개입이 일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승부 조작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한참 타이완에서 프로야구의 인기가 올라가던 시기에 승부 조작이 터지면서 한껏 부풀어 오른 풍선의 바람이 다 빠지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중국이나 타이완의 중화권에서는 흑도의 세력이 자생을 위해 각종 이권에 개입하고 불법적인 일을 해가면서 조직의 운영비를 벌었는데, 그 중심에 마약과 인신매매와 불법 도박 등이 주축입니다. 몇천 년의 역사를 이어 온 흑도의 불법 도박 사업은 현재까지도 근절하기 어려운 검은 뿌리와도 같습니다.


 처음 밝혀진 승부 조작은 흑도(黑道)의 세력에 의해 선수가 협박을 받으면서 조작에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프로 야구가 인기가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도 흑도 세력이 각종 도박에 프로야구를 이용하기 시작했고, 그 수익이 생각만큼 크지 않자 선수와 관계자를 협박하여 의도하는 대로 결과를 만들려는 시도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흑도 세력에 의해 칼침 테러를 당한 故 쉬셩밍 감독이 병원에서 누운 채 인터뷰하는 장면


 1995년에 '블랙 타이거스(黑虎事件)'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어릴 때부터 같이 운동을 했던 선수들이 파벌을 엮어 서로 봐주거나 밀어주는 형태의 경기 조작이 차후에 흑도의 개입으로 발전한 케이스였습니다. 초창기 네 팀 중에 두 팀(웨이취엔, 슝디)은 아마추어 야구단을 가지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프로화가 된 케이스고 통이는 타이디엔(台電隊) 야구팀을 주축으로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싼상 타이거스팀은 다른 세 팀보다 늦게 프로팀을 창단하면서 여러 선수를 끌어모아서 만든 팀이었습니다. 


그 안에 여러 파벌이 있었는데, 이런 파벌 알력 다툼이 심해지고 거기에 약점을 파악한 흑도가 조작을 위해 개입하게 되면서 점차 승부조작으로 발전한 케이스입니다. 

1995년 10월 14일에 최종전 네 게임을 남겨 놓은 상황에서 싼상 타이거스팀은 4연승을 하면 후반기리그 우승을 차지할 수 있는 경기에서 선발이 고의사구를 남발하며 패배하게 되었던 경기가 조작으로 밝혀졌습니다. 그 후 1996년 싼상팀과 웨이취엔팀의 경기 중에 싼상 팀의 후원회장이 경기에 조작이 있었다는 폭로 대자보를 붙이면서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그 후에 일본인 감독인 Takuwa Motoji(宅和本司)와 외국인 선수 네 명(Jose de Jesus, Kevin Dattola, Steve Curry, Chad Devereux)를 포함한 총 14명의 흑도와 연관된 선수들이 팀을 떠났습니다. 그 조사를 하면서 더 깊게 들어가니까 또 다른 승부조작 사건이 밝혀지면서 본격적인, 그러니까 최초의 외부 개입으로 일어나게 된 승부조작 사건으로 연결됩니다. 이것이 바로 1996년 6월에 벌어진 블랙 이글스(黑鷹事件) 사건입니다.  


본격적으로 승부 조작을 하는 방식은 흑도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선수와 관계자를 위협 또른 금전 및 미인계로 유혹하여 넘어오게 한 후에 그 선수를 이용해서 고의로 경기를 망치거나 조작하게 하여 불법 도박판을 구성하는 것인데 검찰에서 블랙 타이거스 사건에 냄새를 맡고 추적하던 중에 다른 줄기를 파헤친 사건으로 수십 명의 전, 현직 선수와 관계자가 걸려 들었습니다. 


 흑도 세력은 1996년 6월 12일부터 얼마 전 세상을 떠난 故 쉬셩밍(徐生明) 씨(한국에 유학을 와서 실업야구팀 한국 화장품에서 투수 생활을 하며 좋은 활약을 펼쳤던 선수 출신으로 타이완의 거두 야구인인 그는 작년에 싱농 불스를 이어 받은 신생팀 이따 라이노스의 감독직을 맡아 전반기 리그 우승을 하는 등 좋은 성적을 올렸으나 후반기를 앞두고 동네 산책을 하다 심근경색으로 쓰러져서 결국 사망하였다.)가 당시 웨이취엔 드레건스의 감독이었는데 승부조작을 하라는 협박을 받았던 일을 시작으로 전방위적인 위협을 가해 왔습니다. 


 그 해 8월에는 슝디 엘리펀츠가 연승을 달리며 기세를 올리고 있을 때 천의신(陳義信), 홍이중(洪一中), 리원촨(李文傳), 천이송(陳逸松), 우푸롄(吳復連) 등의 선수에게 흑도 세력이 호텔로 찾아와서 접근하며 구타 등을 하면서 경기 조작을 하라는 위협을 받았습니다. 구단은 경찰에 신고하였고 이 사건이 흑도 세력이 공개적으로 위협을 한 것으로 밝혀진 첫 사례가 되었습니다. 


 이후부터 실탄을 장착한 경찰력이 야구장에 투입되어 선수와 관계자를 호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에 8월 타이베이 지검에 프로야구 불법 승부조작 사건 전담반이 만들어졌고 검찰관이 투입되어 조사가 시작되었고, 열흘 후에 스바오 이글스팀의 전직 선수였던 청쩡슝(曾政雄)과 불법 도박회사의 수뇌가 승부조작 및 불법도박 혐의로 체포되었습니다. 


 그 후에 10월과 11월에 걸쳐 열린 그 해 프로야구 챔피언 시리즈에 승부 조작이 있었다는 루머가 돌았고, 검찰은 계속 자세히 조사를 하여 결국 1997년 1월에 1차 발표를 하여 허신 웨일스 팀의 선수인 양장신(楊章鑫)을 체포하였습니다. 


웨이취안 드레곤즈의 해산 발표가 실린 당시의 신문 기사/사진 출처 等一個晴天


前 선수 등이 인맥 등을 이용하여 흑도와 결탁해 현직 선수를 위협, 유혹하는 방식인데 그 중심 인물을 체포하였고, 그 사건을 필두로 하여 1997년 9월 10일 최종 결과까지 모두 39명의 전, 현직 선수와 관계자가 체포되었습니다. 그중에 23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고, 두 명은 무죄 확정되었습니다. 


아무튼, 이 사건의 여파로 인해 결국 1998년 9월에 스바오 이글스(時報鷹)팀이 처음으로 팀 해산을 결정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스바오 이글스팀에만 무려 19명의 선수가 체포되어 도저히 운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해산을 결정한 것도 있고, 더 이상의 수익을 위한 팀 운영이 어려워서도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시의 사건 영상을 故 쉬셩밍 감독이 별세한 후에 민스티비 채널에서 회고하면서 올린 자료입니다. 


그로부터 1년 후 1999년 4월 26일에는 웨이취엔 드레건스의 감독이었던 故 쉬셩밍 씨가 아침에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고 오는 길에서 흑도의 괴한들에게 테러를 당해 허벅지와 둔부에 자상을 입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승부조작의 협박을 거절하였다고 테러를 가한 사건인데 이때 정말 타이완 전역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흑도에 의한 선수 협박 및 테러 사건 사례

-흑도 세력이 호텔로 찾아와 슝디 엘리펀츠 선수 다섯 명에게 위협을 가하면서 경기에서 고의로 조작을 할 것을 위협하였고, 그 중 우푸롄 선수는 권총 손잡이 자루에 머리를 맞아 부상을 당했다.

-1997년 8월 3일 싼상 타이거즈 선수 7명(외국인 선수 네 명 포함:Keith Gordon, David Tokheim, Lino Rivera, Cris Colón)에게 흑도 세력이 찾아와 위협을 가하면서 8월 2일 싼상 타이거즈와 스바오 이글스 경기에서 지는 바람에 3천만 위안을 잃어버렸다고 다음 경기에서 조작할 것을 위협하였고 경찰에 조사 의뢰. 이후 두 명의 외국인 선수(Keith Gordon, David Tokheim)는 남은 급여 등을 포기하고 바로 타이완을 떠났다.

-고 쉬셩밍 감독에게 승부조작을 강요하다 안 되니까 흑도 세력 두 명이 쉬감독에게 길거리에서 네 차례의 칼침을 놓은 사건으로 허벅지와 엉덩이에 자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였다.

위의 사례는 공식적으로 밝혀진 사례로 비공식적인 사례는 루머 포함하여 매우 많기에 여기 적지 않겠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계속된 검찰의 조사에 다시 여러 명의 관련자가 체포되면서 2차로 충격을 주었고, 그런 여파로 인해 결국 1999년 11월 8일 싼상 타이거즈(三商虎隊)가 해체되었고, 그 뒤를 이어 1999년 12월 13일에는 결국 웨이취엔 드레건스(味全龍隊)도 팀 해체를 선언하였습니다. 


블랙 이글스 사건 2심에서 감형이 된 소식을 전한 TV 뉴스 속보/TVBS뉴스화면


 블랙 이글스 사건의 고등법원 최종심에서의 판결은 2004년 12월 31일 32명의 피고 중 23명의 선수에게 1년 10월~1년 7월의 징역형을 내렸고, 승부조작의 혐의가 있어 수사를 받던 예쥔장(葉君璋), 장타이산(張泰山) 등 27명의 선수는 혐의없음의 불기소처분을 받고 공백없이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프로야구판을 완전히 뒤흔들어 팀 해체까지 불러온 사건치고는 이해하기 어려운 미미한 처벌로 인해 프로야구를 사랑하는 많은 팬들이 실망한 것은 물론이고 흑도 세력에 의해 다시금 승부 조작이 가능하다고 믿게 한 불씨를 남겨 놓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여파로 프로야구에 쏠리던 관심이 급격히 사그라지면서 프로야구 관중 수에서도 타격이 컸습니다.


1996년 136만 명의 관중이 찾아오면서 뜨거운 인기를 반영했으나 승부조작이 발각된 후인 1997년부터 68만 명으로 전년대비 무려 55.12%가 줄더니 1998년 69만 명, 1999년 49만 명으로 줄다가 2000년에는 결국 겨우 30만 명만 들어와서 4년 만에 무려 100만 명의 관중이 빠져나가는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1995년부터 1997년까지 1, 2차로 벌어진 승부 조작 관련 처리가 미흡하여 2003년 제3차 프로야구 승부조작 사건 재발의 빌미를 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타이완 야구 100년사 - 제8편 ①부 - 는 여기서 마칩니다. 

타이완 야구 100년사 - 제8편 ②부 - 는 2003년부터 2007년까지 벌어진 블랙 베어스와 블렉 웨일스 사건.

타이완 야구 100년사 - 제8 ③부 - 는 2008년과 2009년에 벌어진 블랙 미디어사건과 블랙 엘리펀츠 사건.

을 설명하면서 이번 제8편을 정리하겠습니다.  



*아~아래 손가락 한번 눌러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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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타이완 야구에 대한 전문블로그입니다. 점차 발전하는 중화권 야구에 대한 정보를 모아 지피지기하는 마음으로 만들었습니다. 아무튼 많이 사랑해 주시면 좋겠네요.

 
국제대회에서 만나면 늘 한국과 끝장 승부를 펼치며 격전을 치르는 타이완 야구에 대해서 그저 우린 한국보다 약체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타이완 야구에 관해서 제대로 된 정보도 없고 막연하게나마 그저 약하지 않나? 라는 느낌만을 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국인 선교사에게서 야구를 전수받았고, 타이완은 일본인으로부터 야구를 배웠습니다. 

 그 차이가 별로 없을 것 같지만, 현재 타이완의 야구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어느 정도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한국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타이완 야구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그저 떠도는 풍문이나 낭설, 또는 근거 없는 소리가 난무한 현상이 많기에 10부작 기획 시리즈로 타이완의 야구역사와 그 발전사를 소개합니다. 

 각종 내용의 참조와 관련 사진 및 영상 자료는 타이완의 야후와 구글, 그리고 타이완야구 위키백과, 그리고 타이완 야구 100년사 동영상 등 여러 자료를 참조하였습니다.



지난 편에 이어서 계속 하겠습니다. 지난 편에서는 양대리그의 경쟁까지를 알아봤었는데 이번  편에서는 그 양대리그의 합병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CPBL&TML 양대리그 합병 기자회견/연합보 뉴스 사진

양대리그 통합 합병 협의서


타이완의 프로 야구사에서 TML(Taiwan Major League)의 성립은 야구계에 좋은 기류를 가져다 주었습니다만 비슷한 리그가 두개가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어느 한쪽은 도태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습니다. 좁은 국토에 2,300만 가까이의 인구 수로는 큰 시장을 형성할 수 없었고, 운영을 잘 못하는 한쪽은 도태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었습니다. 


관중 수나 상업적인 판매 등에서 인기가 떨어지는 쪽은 손실이 막대하여 경영이 어려워 질 수밖에 없는 시장 규모와 현실로 둘로 나뉘어진 시장을 두고 프로야구계는 많은 고민을 합니다.


2003년 1월 13일 행정원의 체육위 주관부서의 주 위원인 린더푸(林德福)가 CPBL 연맹과 TML 연맹의 대표 7인(당시 CPBL 연맹회장인 천허동(陳河東), 통이기업(統一企業)의 린창셩(林蒼生) 회장, 슝디구단(兄弟象隊)의 홍뤼허(洪瑞河) 회장, 싱농그룹(興農集團)의 양티엔파(楊天發) 회장, 중국신탁(中國信託)의 린보이(林博義) 회장, 나루완주식회사(那魯灣股份有限公司)의 천성티엔(陳盛沺) 회장, 니엔다이방송국(年代電視台)의 치우푸셩(邱復生) 회장 등)을 소집하여 합병에 대하여 논의를 하였고 결국 천수이비옌(陳水扁) 총통의 직접 입회하에 양대 리그의 수장들이 리그통합 합병협의서에 서명을 하였습니다.

합병을 알리는 신문뉴스 제목


그리고 나루완 주식회사의 동의 하에 TML을 해산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4개 구단이던 TML을 2개 구단으로 통합시켰습니다. 남은 띠이진깡(第一金剛) 팀과 타이양(太陽) 팀은 CPBL로 가입시켰습니다. 그래서 정식으로 두 연맹이 통합되고 명칭은 CPBL로 통합되었습니다.


2003년(프로야구 14년) 3월 1일에 통합리그가 정식으로 타이베이의 티엔무 야구장에서 거행되었습니다.  당시 만 여 명의 관중들로 꽉 찬 개막전은 천 총통의 시구를 시작으로 새로운 타이완의 프로야구로서의 신기원을 열었습니다.

2004년에 청타이 은행이 타이양 팀을 흡수하여 팀 명을 코브라로 개명하였습니다. 그리고 라뉴 기업이 진깡 팀을 인수하여 라뉴 베어즈로 개명하였습니다.


타이완의 프로야구 역사 연대표를 만들었습니다. 아래 첨부하는 이미지를 보시면 연대 순으로 타이완의 

프로야구 역사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큰 이미지로 보시면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올림픽 열기를 프로야구 판으로


2004년 타이완 성인야구 대표팀은 그리스 아테네 올림픽 참가자격을 위한 예선전(일본 삿뽀로에서 열린 제 22회 아시아야구선수권 대회)에서 중국을 3:1로, 그리고 그들의 가장 큰 목표였던 한국을 5:4로 이기면서 아시아 지역 2위까지 주어지는 올림픽 야구 출전권을 따내었습니다. 실로 타이완이란 나라가 들썩할만한 쾌거를 이루었다고 연일 신문과 언론에서는 난리였습니다.

이것은 타이완 야구 대표팀이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이후에 무려 12년 만에 다시 올림픽 무대를 밟게되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이 타이완에서는 승부조작 사건 등으로 몰락해버린 야구의 인기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계기를 만든 중요한 터닝 포인트였습니다. 또한 이 올림픽 출전권을 획득하면서 타이완 전역에 야구 열기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붐을 조성하게 되었습니다.


기대를 안고 출전한 아테네 올림픽에서 타이완 대표팀은 연일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당당하게 5위라는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비록 4강에는 들지 못하였습니다만 중요한 일본과의 경기에서 뼈아픈 패배지만 좋은 경기를 보여주면서 희망을 가지게 했습니다. 


이날 경기는 먼저 일본의 에이스인 우에하라 선수로부터 천진펑(陳金鋒)이 3점 홈런을 쏘아 올리며 3:0으로 이기고 있었는데, 일본의 타카하시 요시노부의 활약으로 결국에는 4:3 역전패를 당하면서 지켜보던 타이완 국민들에게 많은 안타까움을 주었습니다. 이 경기에서 미국으로 진출한 3인방(콜로라도 록키즈의 차오진후이와 LA 다저스의 천진펑, 그리고 뉴욕 양키즈의 왕지엔민)이 활약을 하면서 타이완 국민들에게 많은 자부심을 심어 주었습니다.


(차오진후이의 강속구로 159km/h를 기록한 장면.)


당시 왕지엔민이 선발로 나와 7회까지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위력을 과시하였고, 뒤를 이어 나온 차오진후이가 경기 중에 162km/h가 나왔다고 했는데, 실제 경기 영상에는 159km/h(이 선수의 평속이나 구위를 볼 때 162km/h까지는 안 나오는 투수입니다. 156km/h정도가 가장 빠른 구속이라고 알고 있는데, 당시 올림픽 중계화면에 159km/h라고 뜨기는 떴습니다만 스피드건의 조작 미스나, 또는 구장의 환경이나 바람, 고도 등의 요소로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무튼, 그 기록은 역시 정식으로 인정되지는 않았습니다.)의 강속구를 던졌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고, 역시 미국에 진출한 천진펑 선수가 우에하라에게서 통쾌한 홈런을 뽑아내면서 일약 국민적인 영웅으로 떠올랐습니다.

 
  (아테네 올림픽에서 일본 에이스 우에하라로부터 3점 홈런을 뽑아낸 천진펑 선수: 5분50초부터)


타이완야구 100년사 제 7편 종료.

다음 제 8편에서는 프로야구의 흥망성쇠(興亡盛衰) 중에 주로 망과 쇠편이 되겠습니다. 불법적인 승부 조작과 화이트 글러브 사건, 그리고 도박 세력과의 연계로 점점 수렁에 빠지는 타이완 프로야구계의 현실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2014년 1월 13일 지난 7편까지를 재편집하면서 타이완 야구 100년의 역사 시리즈가 7편까지 적은 후 한참을 손을 놓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다음 8편은 조만간 정리해서 업데이트 하겠습니다. 사실 8편의 내용이 많아서 한텀 쉬어가려고 했던 것인데, 귀차니즘이 발동되어 쭈욱 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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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대회에서 만나면 늘 한국과 끝장 승부를 펼치며 격전을 치르는 타이완 야구에 대해서 그저 우린 한국보다 약체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타이완 야구에 관해서 제대로 된 정보도 없고 막연하게나마 그저 약하지 않나? 라는 느낌만을 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국인 선교사에게서 야구를 전수받았고, 타이완은 일본인으로부터 야구를 배웠습니다. 

 그 차이가 별로 없을 것 같지만, 현재 타이완의 야구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어느 정도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한국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타이완 야구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그저 떠도는 풍문이나 낭설, 또는 근거 없는 소리가 난무한 현상이 많기에 10부작 기획 시리즈로 타이완의 야구역사와 그 발전사를 소개합니다. 

 각종 내용의 참조와 관련 사진 및 영상 자료는 타이완의 야후와 구글, 그리고 타이완야구 위키백과, 그리고 타이완 야구 100년사 동영상 등 여러 자료를 참조하였습니다.


타이완 프로야구 팀의 중흥기

타이완 프로야구 연고지 주의 당시 구역도/제작 竹板凳


야구의 프로화가 시작되면서 그간 죽어있던 3급야구 또한 같이 부활의 조짐이 보였습니다. 타이완의 프로 야구는 1989년 처음 연맹(中華職業棒球大聯盟:CPBL)을 만들었고, 다음 해인 1990년 처음 4개 팀[싼상 타이거즈(三商虎隊)와 웨이취엔 드레곤즈(味全龍), 통이 라이온즈(統一獅), 슝디 엘리펀츠(兄弟象)]으로 먼저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 1993년 스바오 이글스(報鷹隊)와 쥔구어 베어즈(俊國熊) 등 두 팀이 더 늘었고, 다시 1997년 허신 웨일즈[和信鯨隊:뒤에 중신 웨일즈(中信鯨)로 개명]가 추가되면서 모두 7개 팀으로 늘어난 것입니다. 그러면서 프로야구가 타이완에서 부흥기를 맞이하면서 각계각층의 관심과 관중 수(아래 CPBL 관중 수 표 참조)도 꾸준히 늘어나면서 1993년부터 1996년까지 최절정의 시기를 맞게 됩니다. 


각 기업체에서는 스폰서를 따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였고, 구장 광고나 각종 프로모션에서 프로야구와 관련된 마케팅을 연계하느라 바쁜 절정의 시기였습니다. 아마추어 팀의 창단도 늘어났고, 학생 야구도 덩달아 다시 많아졌고, 지원도 풍부해 졌으며, 야구 인프라에 대한 투자도 많이 늘어나는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국제 대회에서의 성적도 비교적 좋은 편인지라 이 시기를 거치면서 타이완 사람들의 생활 속으로 깊숙히 파고든 진정한 야구의 부흥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TML의 성립과 분열 조짐


타이완 직업야구 대연맹(T.M.L.Taiwan Major League)은 1996년 원래 CPBL에 참가하기로 되어 있었던 성바오 회사(聲寶公司)의 성바오 자이언츠 팀이 참가 권리금 및 여러가지 이유 등으로 참가할 수 없게 되자 당시 니옌다이 방송국(年代電視台)의 회장인 치우푸셩(邱復生)과 성바오 회사의 천청티엔(陳盛沺)의 지원 아래 1996년 1월20일 독자적으로 리그 운영 회사인 나루완(那魯灣) 주식회사를 만들어서 프로야구 운영을 맡기는 형태로 창설된 타이완의 두 번째 야구리그입니다.


사전 리그창설 준비운동으로 바쁜 나날을 보낸 후 T.M.L은 성바오 린코우 야구장(聲寶林口球場)에서 첫 훈련을 가졌고, 1996년 6월 18일에 네 개 팀으로 정식 리그 출범을 알렸습니다. 참여 팀은 타이베이 타이양 팀(台北太陽隊/Taipei Gida), 지아난 용스 팀(嘉南勇士隊/Chianan Luka), 가오빙 레이공 팀(高屏雷公隊/Kaoping Fala)과 타이중 진깡 팀(台中金剛隊/Taichung Agan)입니다. 


1997년 2월 28일 정식으로 타이완 프로야구 연맹(T.M.L)의 첫 경기를 가지면서 타이완에서 2대 리그(TML과 CPBL)가 동시에 운용이 되는 시대를 열었습니다.


위기에 봉착하다(승부조작 사건) 

1996년에 첫 번째로 프로야구 선수 등이 불법 도박과 승부 조작을 한 사건이 터졌습니다. 수십 명의 선수가 구속되었고, 검찰에 의해 기소 되었으며 그대로 운동을 그만두게 되는 엄청난 사건으로 타이완의 프로 야구계는 이후로 길고 긴 암흑기에 접어들게 됩니다.


그 사건으로 인해 각종 광고나 마케팅 등의 구단 수익 효과가 절대적으로 줄어들게 되었고, 관중들도 커다란 실망감으로 점차 야구장을 떠나게 되었고, 구단은 줄어드는 수입으로 인하여 선수를 팔거나 방출하거나 급여를 줄이는 긴축 재정을 하면서부터 점점 전체적인 실력도 떨어지게 되었고, 관중들이 느끼는 재미도 없어지면서, 구단의 재정난이 반복되고, 그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승부 조작과 암흑 세력과의 연계로 불법 도박에 다시 빠지는 등의 악순환의 고리에 올라타게 되었던 것입니다.


TML 리그의 총 관중 수와 평균 관중 수

  TML 연도     게임 수   총 관중수(명)   평균 인원(명)
 TML1996년        192      696999       3630
 TML1997년       216       695936         3222
 TML1998년        168       553659         3296
 TML1999년        168       568080         3381
 TML2000년       120       217716         1814
 TML2001년        144     184103       1278


첫 번째 사건이 터지고 나서 약 9년 후인 2005년에 다시금 20여 명이 연루된 승부 조작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경찰이 연맹의 기록을 압수하고 조사한 후에 약 20여 명의 선수들과 감독, 코치 등의 연루자를 색출하여 기소하는 등 두 번째의 불미스러운 사건이 터지게 됩니다. 

그 후에 많은 선수들과 프로야구 관계자 등이 자정작업을 위한 선언을 하고 자체정화에 나서는 등의 잠깐동안 깨끗해지기는 하였지만 프로야구계에 이미 암흑 세력이 깊게 뿌리를 내려 뻗은 상태에서는 그 효과가 별로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프로야구 구단들은 자정작업을 하거나 클린 선서 운동을 하거나 여러 가지의 부산스러운 움직임을 보였습니다만 큰 효과는 보지 못했습니다.

아무튼, 그 대책으로 만들어진 것이 퇴직 경찰들로 구성된 '자정단(維安小組/ Maintenance Safe Group)'의 창설입니다. 하는 일은 폭력배로부터 선수들의 보호와 검은 세력과의 차단과 구장 및 현장에서의 폭력 및 도박에 관한 관련 증거의 수집과 그 예방이 주목적이지만 실제적으로 그 효과가 선수들에게까지 미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선수들는 여전히 비교적 적은 임금을 받으면서 시합에 뛰어야 했고, 노후대책이 전혀 안된 상태에서 부상이나 각종 이유 등으로 선수 생활을 그만두면 생계가 안되기 때문에, 언제든지 다시 승부조작의 유혹에 빠져들 수 있는 근본적인 문제가 늘 상주하고 있었던 셈이었지요.


그래서 몇 명의 퇴직 경찰들로서는 그런 일들을 모두 예방하면서 막아내기에 사실상의 역부족인 셈이었죠. 이것은 구단들도 역부족이라고 인정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폭력 조직이 개인적으로 선수들을 꾀여내던가, 아니면 경기 외적인 시간에 납치를 해서 위협을 한다든가의 사건을 막아내자는 것인데 실상은 비일비재로 계속 납치와 협박과 유혹이 있었으며, 그것들을 몇몇 퇴직 경찰관들이 다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아무튼, 이번에도 완벽한 수술로 뿌리깊은 악성 종양을 다 도려내지 못한 채 서둘러 배를 닫아버리는 미봉책에 그치면서 다시 그 뒷맛을 남겨놓은 채 야구판은 상처만 입고 다시 어떻게 흘러갑니다. (그 불씨가 다시 2008년에 미디어 티렉스 팀의 폭력배가 개입된 불법 승부조작 및 도박 사건으로 터져나와 팀이 법원에 의해 강제로 해체되었고, 중신 웨일즈 팀은 그런 여파로 자진 해산을 하게 됩니다. 중신 웨일즈 팀은 그 후 다시 재창단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CPBL의 총 관중 수와 평균 관중 추이

      연도별    총게임수       누적 관중 수  평균 관중 수
       1990      180          899,955      5,000
       1991      180        1,050,405      5,836
       1992      180        1,238,063      6,878
       1993      270        1,600,549      5,928
       1994      270        1,607,677      5,954
       1995      300        1,646,361      5,488
       1996      300        1,364,424      4,548
       1997     336        685,832     2,041
       1998      315          690,089      2,191
       1999      278*          496,433      1,786
       2000      180          301,671      1,676
       2001      180          337,707      1,876
       2002      180          532,304      2,957
       2003      300          958,596      3,195
       2004      300        1,051,517      3,505
       2005      301        1,025,695      3,408
       2006     300        679,205     2,264
       2007     300        612,887     2,043
       2008      298**          572,692      1,922
     총계    4,948      17,352,062     3,507
*1999년은 지진으로 인하여 22게임이 취소되었습니다. 
**2008년은 미디어티렉스팀의 강제 해체사건으로 2게임이 취소되었습니다.
굵은 글씨체는 도박사건 이후의 관중 감소 추이를 강조함


프로야구 팀들의 해체 파도와 그 이후.

1996년 쥔구어 베어즈는 구단의 경영권을 싱농기업(興農企業)에 넘기면서 싱농 베어즈(興農熊隊)로 재탄생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뒤에 다시 싱농 불스(興農牛)로 개명을 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1998년에는 스바오 이글즈가 정식으로 해체됩니다. 도박 사건에 크게 연루되면서 기업가치가 폭락하고 구단의 재산인 선수들이 대거 구속되면서 더이상 프로야구 팀을 꾸려갈 여력이 없는 것이 원인이 되어 구단을 해체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1999년 원년 팀이었던 싼상 타이거즈와 웨이취엔 드레곤즈 역시 팀을 해산시켰습니다. 처음 4개 팀으로 시작되어 7개 팀까지 발전되었던 타이완의 프로야구 판은 이제 다시 4개 팀(슝디 엘리펀츠, 통이 라이온즈, 싱농 불스, 중신 웨일즈) 체제로 돌아갑니다.


두 연맹의 경쟁구도


타이완 메이져리그인 TML은 CPBL보다 뒤늦게 생겨났지만 바로 경쟁구도를 갖추면서 겉모습은 본격적으로 경쟁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상을 보면 그 효과는 별로 크지 않았습니다. 구단이 존속하려면 상업적인 이익을 봐야 하는데, 연이어 터진 불미스러운 사건과 사고들로 인해 일반 대중들의 관심이 떠나버렸고, 그래서 구단 자체의 수익도 현저히 줄어든 상태에서 시스템 상으로만 경쟁 구도였지 상업적으로 도움이 별로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선수 수급면에서도 유망주들은 어떻게든 해외로 빠져나갔고 남은 자원을 가지고 TML과 CPBL이 선수 확보 경쟁을 했기에 야구 자체에 대한 발전도 더디고 오히려 지원도 없어지고 심리적인 의욕이 떨어진 선수들로 인해서 전체적인 리그가 하락세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던 시기였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두 연맹의 통합에 대한 내용과 다시 인기를 살리기 위한 여러가지 노력 등을 소개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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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차이가 별로 없을 것 같지만, 현재 타이완의 야구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어느 정도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한국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타이완 야구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그저 떠도는 풍문이나 낭설, 또는 근거 없는 소리가 난무한 현상이 많기에 10부작 기획 시리즈로 타이완의 야구역사와 그 발전사를 소개합니다. 

 각종 내용의 참조와 관련 사진 및 영상 자료는 타이완의 야후와 구글, 그리고 타이완야구 위키백과, 그리고 타이완 야구 100년사 동영상 등 여러 자료를 참조하였습니다.


 프로야구의 태동(1990년대 이후)


(타이완 프로야구 원년인 1990년에 열린 올스타전 영상입니다.)


1980년대 이후 타이완 야구 세계화의 주요 근원이 되었던 3급 야구가 급격히 퇴보하게 되면서 성인야구 또한 세계의 무대에서 밀려났습니다. 지금와서 되돌아보면 야구 선수로서의 진로 문제나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가 대두되었던 시기입니다. 여러 실업 팀들이 있었지만 그다지 큰 매력으로 자리 잡지는 못하였고, 리틀야구나 청소년 야구가 국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많은 학생들이 야구 선수로의 꿈을 키운 후 생겨난 많은 팀들 또한 나중에는 발전에 정체가 되는 원인이 되었기도 합니다. 문제는 학생 시절이 끝나면 실업 리그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전국체전격의 대회에서 입장하는 야구팀/출처미상



국제 대회에서 대표 팀은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나 국내 갑조(甲組) 야구리그는 항상 관중석이 텅 비어있는 상태로 진행(당시 실업야구는 입장료를 받았습니다만 팀 운영비로 충당되어야 할 입장료 수익이 거의 없으니 해당 구단이 경영 난에 빠지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습니다.)되어야 했고, 이에 선수들도 자국의 야구보다는 좀 더 많은 수익을 보장하는 일본 쪽으로 눈을 돌리게 되면서 유망주의 해외 유출이 심해지고, 점점 타이완 사람들의 야구에 대한 애정도 식어가면서 성인 야구계는 점점 암흑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이 때에 위기를 타개하고 야구에 대한 애정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이가 바로 슝디(兄弟)호텔 그룹의 회장인 홍텅셩(洪騰勝)씨였습니다. 아마추어 야구시장의 침체는 프로화로 풀어야 한다는 의지를 가지고 주도적으로 프로 리그 창설에 나서면서 적극적으로 정부와 사회에 야구의 프로화를 요구합니다.



슝디호텔그룹의 현재모습



프로야구의 탄생/ 타이완 프로야구 연맹의 성립

1987년 12월31일에 프로야구 태동 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당시 야구협회 이사장인 탕판판(唐盼盼)씨가 겸직을 하여 主위원을 맡았습니다. 그로부터 반 년 후에 위원회는 규약을 완성하고 타이완 프로야구의 발전 방향을 잡아 나갔습니다. 프로야구 희망 기업을 선정하여 준비 작업을 시작하고, 야구규장과 규약을 보충 및 확정하였고, 구장에 대한 선정과 보충, 보완 등의 작업과 심판에 대한 육성과 심판 제도에 대한 규정을 제정하고 본격적인 프로화 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1989년 10월 23일에 드디어 중화 프로야구 연맹이 정식으로 출범하게 됩니다. 참가 팀은 웨이취엔(味全), 통이(統一), 싼상(三商), 슝디(兄弟) 등의 네 개의 기업이 프로구단을 창설하면서 타이완 역사상 최초의 프로 야구팀으로 기록됩니다.


1990년 3월 17일에 드디어 역사적인 타이완 프로야구 첫 시즌의 첫 게임이 시작되었습니다. 웨이취엔 드레곤즈와 통이 라이온즈, 싼상 타이거즈와 슝디 엘리펀츠로 각각 팀명을 정하고 리그를 시작했습니다. 이로서 아시아권에서 일본과 한국에 이어서 세 번째로 프로야구를 시작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역사적인 타이완 프로야구의 개막 경기는 타이베이 시립야구장에서 열렸습니다.


슝디 엘리펀츠와 통이 라이온즈와의 경기로 이후 이 두 팀은 타이완에서도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서의 자리매김을 하게됩니다. 아무튼 첫 경기의 결과는 통이 라이온즈가 슝디 엘리펀츠를 물리치고 역사적인 첫 승을 기록한 팀으로 영원히 남게 되었습니다. 


당시 첫 승을 올린 통이 라이온즈의 두푸밍(杜福明) 투수가 첫 승의 기록을 남기게 되었구요, 당일 또 다른 경기장에서 벌어진 싼상 타이거즈의 투수 투홍친(涂鴻欽) 선수가 웨이취엔 드레곤즈를 상대로 첫 완봉승을 기록한 선수로 남게되었습니다.


통이Vs웨이취엔 프로원년 입장권/사진출처 Mirage-2000's Secret Base

통이Vs슝디 프로원년 입장권/사진출처 Mirage-2000's Secret Base



타이완 프로야구의 성장/프로야구의 열기가 높아지다



1990년 타이완에 프로야구가 처음으로 시작된 지 몇 년 후. 타이완의 야구계는 대폭적인 성장을 하였습니다. 먼저 야구 선수에 대한 처우가 실업 리그에 있을 때보다 훨씬 많이 개선되었습니다. 그 전 아마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생활할 수 있을 정도의 수입이 보장되었고, 각종 광고나 스폰서로 인해서 월급 외의 수입도 생겨났고, 프로화로 각종 방송 노출도 되어 자연스럽게 선수들의 사회적 지위도 같이 상승되었습니다.


실력이 뛰어난 선수들이 자연스럽게 유명세를 타고 우상화되면서 스타를 좋아하는 팬층이 자연스럽게 같이 생겨났고, 어린이들에게 꿈을 주는 스포츠가 되면서 야구를 즐기는 어린이들이 많아지는 등의 야구의 저변도 확대가 되었습니다.


올해로 20주년을 맞은 타이완의 프로야구 CPBL 홈페이지 모습 /http://www.cpbl.com.tw


1990년부터 1997년까지 프로야구 누적관중 수가 1,000만 명(타이완 全 섬의 인구가 2,300만 명)을 돌파하게 되면서 정부에서도 야구의 프로화에 따른 효과를 점차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타이완 총통과 행정원장 및 각계 대표들이 야구장을 찾아 협력을 위한 단결을 하여 타이완의 정치적인 염원인 국제대회 유치를 위한 돔 구장 건설(참고자료)을 결정하여 현재 건설 중에 있습니다. 


또한, 각 지방 정부와도 합작을 하여 노화된 야구장의 보수 및 신축 등을 결정하여 프로화가 시작된 1990년에 겨우 다섯 개 밖에 없던 야구장이 현재는 프로야구 경기를 할 수 있는 야구장이 모두 17개 구장으로 늘어났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절대적으로 정부의 큰 도움이 있었던 시기입니다. 

타이완의 야구장 자료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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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타이완 야구에 대한 전문블로그입니다. 점차 발전하는 중화권 야구에 대한 정보를 모아 지피지기하는 마음으로 만들었습니다. 아무튼 많이 사랑해 주시면 좋겠네요.

 국제대회에서 만나면 늘 한국과 끝장 승부를 펼치며 격전을 치르는 타이완 야구에 대해서 그저 우린 한국보다 약체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타이완 야구에 관해서 제대로 된 정보도 없고 막연하게나마 그저 약하지 않나? 라는 느낌만을 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국인 선교사에게서 야구를 전수받았고, 타이완은 일본인으로부터 야구를 배웠습니다. 

 그 차이가 별로 없을 것 같지만, 현재 타이완의 야구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어느 정도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한국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타이완 야구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그저 떠도는 풍문이나 낭설, 또는 근거 없는 소리가 난무한 현상이 많기에 10부작 기획 시리즈로 타이완의 야구역사와 그 발전사를 소개합니다. 

 각종 내용의 참조와 관련 사진 및 영상 자료는 타이완의 야후와 구글, 그리고 타이완야구 위키백과, 그리고 타이완 야구 100년사 동영상 등 여러 자료를 참조하였습니다.



3관왕의 광풍이 몰아치던 시기


타이완의 리틀 야구가 세계대회에서 처음으로 패권을 거머진 후, 타이완에서는 리틀야구와 청소년야구가 지속적으로 국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이어가기 위하여 많은 투자와 엄청난 노력을 했고, 결국 그것이 나중에 여러 국제 대회에서의 좋은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미국 Williamsport, PA 야구장의 모습 /구글어스로 검색


1969년 진롱(金龍)야구팀이 윌리엄스포터(Williamsport) 배에서 우승한 후, 1996년까지 모두 17 차례나 우승하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타이완 청소년 야구팀은 1972년 또다시 이번엔 윌리엄스포터 시가 아니고 미국 게리(Gary:시카고 부근)시에서 처음으로 열린 세계 리틀야구 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였습니다. 리틀 야구보다 더 나이가 많은 청소년 야구 팀은 1974년 미국 로더데일에서 열린 대회에 처음 참가하게 되는데 리틀야구와 마찬가지로 1996년까지 모두 17회나 우승하는 결과를 보여줍니다.

타이완의 3급 야구팀(리틀 야구, 청소년 야구, 청년 야구를 3급이라고 함)은 모두 6번이나 3급 야구팀 동반 우승의 기염을 토하는데 1974년, 1977년, 1978년, 1988년, 1990년과 1991년까지 총 여섯 번입니다. 이 시기를 가리켜 타이완 야구 3관왕의 광풍시기라고 합니다. (1984년에는 서울에서 리틀야구 월드시리즈 챔피언쉽 대회가 열렸는데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제이슨 베리텍(보스톤 레드삭스)도 알타몬테 스프링스팀 소속으로 한국에 왔었죠. 그땐 몰랐겠죠? 나중에 유명한 메이져리거가 된다는것을...


장기 발전의 기초를 닦다.


이 시기야말로 타이완 야구계에 있어서 야구의 부흥기를 지나 전 세계에 타이완 야구가 무엇이다를 보여준 활황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의심할 수 없는 크레이지 모드였고 이런 결과들이 타이완 사람들에게 민족적인 자긍심과 기개를 떨치게 해 준 그야말로 야구 이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쾌감을 안겨다 준 르네상스 시기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중에 3급야구의 활황세가 
타이완에 야구의 기초를 확실히 닦아주었기에 나중에 성인야구에서 수많은 좋은 선수가 배출이 되고 자연스럽게 전체적인 기반이 튼튼해지는 결과를 가져왔고 타이완 야구가 세계에 그 실력을 과시한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성인 시기의 대만야구(1980년~1990년대)

신임야구협회장 옌샤오쟝(嚴孝章)(左)1981년 사진 聯合報

1980년~1990년대의 타이완 야구는 장기적으로 좋은 결과의 꽃을 피우기 위한 노력을 하던 시기입니다. 


당시 타이완의 성인 야구는 국내외의 정치적인 요소(1979년 1월 1일부로 미국이 타이완과의 외교관계를 끊었습니다. 이후에 중국; 당시 중공의 훼방으로 거의 모든 국제 대회에 타이완은 참가할 수 없게 됩니다)로 인해 몇 년간 모든 국제 대회에 참가하지 못합니다.

몇 년 후에 타이완 성인야구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옌샤오쟝(嚴孝章) 야구협회 이사장(아시아 야구연맹 부회장 역임)의 노력 끝에 정치적으로 얽힌 문제(중공과의 정치적인 문제는 국호의 사용 문제와 국기의 사용 문제를 놓고 대립각을 세웠던 일을 말합니다.)를 풀고 다시금 여러 국제 대회에 참가하기 시작했습니다.
 
1982년의 서울에서 열린 세계 베이스볼 월드컵(Baseball World Cup : 당시의 명칭은 세계야구 선수권대회)에서 
타이완 성인 야구 대표팀은 6승 3패의 전적으로 한국과 미국 일본에 뒤져 4위를 차지합니다. 당시 한국 팀은 8승 1패의 성적으로 우승하게 되는데, 여러분들이 다 기억하고 계시는 잠실 야구장에서 선발 선동렬 투수의 호투와 김재박 감독의 기막힌 개구리 번트의 성공과 한대화 선수의 통쾌한 역전 3점 홈런으로 결승에서 일본을 누르고 우승한 바로 그 대회입니다. 

이어 다음 해 열린 아시아 야구선수권 대회에서는 한국과 일본, 
타이완이 각각 5승 2패로 공동 우승을 차지하였는데, 일본을 꺾은 결과가 다음 LA올림픽 야구 출전권 획득이라는 수확을 안겨다줍니다. 그해 열린 대륙간컵에서 타이완 팀은 3등을 차지 하였습니다. 


이변인것은 야구 절대강국인 쿠바를 타이완이 13대 1로 이기는 파란을 몰고 왔던 대회이기도 하여 기억에 남습니다. 그리고 참가한 제23회 LA 올림픽에서는 동메달이라는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대만 대표팀/中央社 제공

같은 해에 열린 세계 야구선수권대회에서도 쿠바에 이어 은메달을 차지하였고,  1986년 네덜란드에서 거행된 세계야구 선수권대회에서도 동메달을 따냄으로서 타이완 성인야구의 전성기를 이어갔습니다. 

그 이후에도 1987년 아시아 야구선수권 대회 은메달로 올림픽 참가권을 따내어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참가하였으나 예선 3연패로 탈락하였고, 이후 1991년 중국에서 열린 아시아 야구 선수권대회에서는 은메달로 다시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출전권을 따내었습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처음 정식 종목으로 편입된 야구경기에서 
타이완 팀이 은메달을 따냄으로서 타이완 야구 최고의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기사에 은메달을 따고 돌아온 야구 대표팀에게 상금 등으로 모두 1억 1,550만 위엔(현재 환율로 환산하면 한국 돈 50억 가량으로 코치진과 선수단 포함하여 24명 규모로 일인당 약 2억 가량을 획득)을 주었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궈위엔즈(郭源治)의 투구모습 /사진 聯合報

이 당시 80~90년대에 활약하던 선수들이 바로 현재 각 팀의 코치나 감독 급으로 자라왔던 것입니다. 


그 당시 선수들의 면면을 돌아보면 궈리지엔푸(郭李建夫), 가오잉지에(高英傑), 리라이파(李來發), 궈위엔즈(郭源治), 궈타이위엔(郭泰源), 장승시웅(莊勝雄), 쉬성밍(徐生明), 린화웨이(林華韋), 황광치(黃廣琪), 리쥐밍(李居明), 뤼밍츠(呂明賜), 짜오쓰치앙(趙士強), 천이신(陳義信), 황핑양(黃平洋), 홍이중(洪一中), 쩡바이승(鄭百勝) 등의 야구인들입니다. 



이 선수들이 바로 타이완 야구의 절대 중흥기였던 3급 야구 시절에 활약하고 자라왔던 선수들이고, 타이완 야구의 보물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하지만 당시 타이완은 프로야구가 없었기에 이 선수들이 대부분 일본으로 진출하여 이후 우수한 타이완 야구 유망주들이 자국 리그에 몸담지 않고 해외 진출에의 꿈을 가지게 되는는 부작용 아닌 부작용도 생겨나게 되는 그런 시기였습니다.


                                           제 4부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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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대회에서 만나면 늘 한국과 끝장 승부를 펼치며 격전을 치르는 타이완 야구에 대해서 그저 우린 한국보다 약체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타이완 야구에 관해서 제대로 된 정보도 없고 막연하게나마 그저 약하지 않나? 라는 느낌만을 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국인 선교사에게서 야구를 전수받았고, 타이완은 일본인으로부터 야구를 배웠습니다. 

 그 차이가 별로 없을 것 같지만, 현재 타이완의 야구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어느 정도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한국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타이완 야구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그저 떠도는 풍문이나 낭설, 또는 근거 없는 소리가 난무한 현상이 많기에 10부작 기획 시리즈로 타이완의 야구역사와 그 발전사를 소개합니다. 

 각종 내용의 참조와 관련 사진 및 영상 자료는 타이완의 야후와 구글, 그리고 타이완야구 위키백과, 그리고 타이완 야구 100년사 동영상 등 여러 자료를 참조하였습니다.


전편에서 타이완의 야구가 국제대회에서의 입상을 계기로 수많은 각종 야구 대회가 생겨나고 많은 팀들이 창단하게 되면서 야구의 중흥기가 시작되는 기초를 다졌다는 내용이었고, 이번 3부는 그 중흥기에 꽃을 피운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3급 야구운동시기의 타이완 야구(1960년대~1980년대)

3급 야구란 어린이 야구, 청소년 야구, 청년 야구를 말합니다. 1970년대 타이완의 경제가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수출에 힘을 써서 경제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던 시기인데 그 시기와 맞물려서 3급 야구 또한 광풍이 불 정도로 활황이였습니다. 모든 사회계층이 야구 민족주의의 색채를 띄고 야구에 몰입하던, 그리고 그 야구에 열광하던 그런 시기였습니다.

홍예촨치(紅葉傳奇)

1968년 8월 타이동(台東)의 홍예 리틀 야구단 이야기입니다. 내방한 일본 리틀 야구단을 2전 전승으로 물리치고 타이완 민중에 민족적인 자존심을 가져다 준 스토리인데요 그걸 영화화해서 전 타이완 사람들에게 큰 기쁨의 광풍을 가져다 준 이야기였습니다.



The Red Leaf Legend(PIFF사진)


1999년에 재 각색하여 '紅葉傳奇(The Red Leaf Legend)'<-상세정보클릭란 이름으로 제 4회 부산 국제 영화제(PIFF)에 출품하기도 한 작품입니다. 관심있게 보신 분들이 있을테지요? 아쉽게도 전 못봤습니다만 보신 분들이 감상이 어떤지 말씀 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혹시 소장하고 계신 분이라도 있으시다면 꼭 좀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진롱출격(金龍出擊)

 1969년 금룡 소년야구팀(Golden Dragon little-league baseball team)은 원동(遠東)지구의 대표권을 획득하여 미국 어린이 야구연맹에서 주최하는 세계 어린이야구 대회-앞서 시리즈 1회에서도 소개하였던 윌리엄스 포터에서 거행된 제 23회 세계 리틀야구 챔피온쉽-에 참가하여 우승까지 하게 되면서, 비록 작은 규모의 국제대회이긴 하였으나 타이완 최초로 국제 대회 참가 사상 우승의 영예를 안게 된 것으로서, 타이완 야구계뿐만 아니라 전 타이완 사람들에게 커다란 기쁨과 민족적인 기개를 떨치게 한 영광으로 받아 들여지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로 인해 야구에 대한 열풍은 물론이고 동반하여 경제적인 시너지 효과까지 가져다 주는 전환기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당시 언론 기사를 보면 우승하고 귀국하는 금룡 소년 야구팀의 환영 행사에 무려 15만 명의 타이완 사람들이 나와서 환영했다고 합니다. 리틀 야구팀 환영일파가 15만이라니 참 대단하지요?


민족주의의 광풍이 불어오다.



타이완에서의 야구는 그냥 야구가 아닙니다. 야구에 민족적 역량을 대입하여 같이 숨쉬고 같이 움직이며 같이 느끼고 있는것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중공이 중국의 대표권을 얻게되고 그 여파로 인해 1971년에 타이완이 UN에서 퇴출이 되고부터 갑자기 각종 언론 미디어에서 민족주의를 결합한 내용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야구선수들이나 각 팀들이 모두 입을모아 '야구로 양키를 이기자'란 표현들이 흘러나오게 되었는데, 그런 맥락에서 이 당시의 타이완 야구계는 민족주의의 광풍 그 중심에 서서 분위기를 주도하였고 자연스럽게 국제대회에 참가하는 일도 많아지고 좋은 성적을 얻으면 민족의 영웅으로 부상하던 시기였습니다.


圖片簡述:中華金龍少棒隊榮歸。 拍攝日期:1969-09-08 所有人:聯合報提供  本照片由聯合報授權提供,因合約限制僅供站內使用,請勿任意轉貼;有需此照片者請逕洽聯合知識庫。

사진설명:금룡소년야구단 귀국환영일파

촬영시기:1969년 9월8일 소유권한:연합보제공





촬영시기:1969년 9월8일 소유권한:연합보제공


 

금룡팀의 세계리틀야구 우승기

세계대회 우승패


                           ©ARR 사진제공.


* 월리엄스 포터에 대한 이야기는 본 시리즈의 1편에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남 메이허(美和), 북 화싱(華興), 동 롱공(榮工)


리틀야구에서 우승한 직후에
타이완에서 엄청난 수의 어린이 야구단이 만들어지게 되고 국민적인 관심을 끌게되면서 자연스레 학생 야구가 관심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리틀야구, 청소년야구, 청년야구를 말하는게 3급 야구라고 했는데, 그 중심에 선 강팀이 소제목과도 같은 메이허 중학야구단과 타이베이 화싱야구단입니다. 


이 두 학교의 주축을 중심으로 그 후 많은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국내에서도 라이벌 관계 남 메이허, 북 화싱이라 불리던 양강체제를 이끌었습니다. 이 두학교는 자연스럽게 뒤에 원화 대학(文化大學)과 푸런 대학(輔仁大學)의 양강 체제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1971년에 이번 시리즈의 2편에서 언급되었던 화롄 지역에 롱공 야구단이 생기면서 남 메이허, 북 화싱, 동 롱공의 3강 체제로 3급 야구 중흥기 시대를 풍미했습니다.

메이허중학야구단/사진 타이완야후 제공



메이허중학야구단/사진 타이완야후 제공



화싱중학야구단/사진 聯合보 제공



학생야구의 열풍이 불어오던 시기인 제 3부에 대한 소개는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제 4부에서는 타이완 성인 야구의 중흥기였던 1980년대와 1990년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여러가지 기획들로 조금씩 제 생각보다는 업데이트가 늦어지고 있습니다. 게을러서 그런 것인데, 혹시나 다음 내용을 기다리고 계신 분이 있다면 정말 죄송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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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종 내용의 참조와 관련 사진 및 영상 자료는 타이완의 야후와 구글, 그리고 타이완야구 위키백과, 그리고 타이완 야구 100년사 동영상 등 여러 자료를 참조하였습니다.


화롄 원주민(蓮原住民)의 가오샤 야구단(高砂棒球隊)

 

화롄 지역의 위치도


가오샤(高砂야구단은 타이완 동부 최고의 팀이었습니다타이완야구 사상 아주 중요한 팀중의 하나 입니다. 가오샤(高砂)라는 말의 어원은 일본 전국시대 덕천 막부시절의 타이완을 부르던 고어(古語)입니다. 타이완의 원주민을 가오샤족(高砂族)이라고 칭하면서 나온 말인데, 당시의 일본인들은 지금의 타이완을 가오샤국(高砂國)이라고 불렀습니다. 

 뒤에 남양에서 일본군과 싸우던 의용군을 가오샤 의용군(高砂義勇軍)이라고 부르기도 했었지요. 아무튼 이 가오샤라는 뜻은 타이완을 뜻하는 아름다운 섬이라는 말입니다.


 1
921년 야구에 푹빠진 선생님 린꾸이위(林桂興)가 타이베이에서 임시교사로 재직하던 당시 3학교에서 야구부를 맡아서 지도한 적이 있었고, 나중에 화롄지역으로 발령을 받아서 가보니 그 지역에는 아직 야구부가 없는 것을 발견하고는 부근의 원주민 소년들을 모아 테스트를 해 봤는데 그 지역 원주민 아이들 중의 한 (차우마:屋馬)이 기타 지역의 아이들보다 훨씬 빠르고 강한 공을 던지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그 공을 받아 줄 포수가 없어서 애태우다가 아예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돌아다니면서 적합한 인물을 찾았는데 이름이 꾸마오더(辜茂得)라는 친구였습니다.



<예전의 가오샤 야구단(高砂棒球隊) 모습>

린꾸이위(林桂興)는 그 두 소년을 주축으로 그곳의 원주민 아이들을 규합하여 가오샤 야구단(高砂棒球隊)만들었습니다. 그 지역에는 당시 일본인들이 대규모로 이주하여 2차 세계대전이 끝날때까지 화롄의 농업을 독점하였습니다. 수많은 일본인 거주민들이 야구팀을 만들어 즐겼는데, 그 야구팀들과 화롄지역의 화강산(花岡山) 야구장에서 연습시합을 하였는데, 이 팀이 바로 타이완 최초의 원주민 야구팀인 가오샤(高砂)야구단입니다.




 <화강산(花岡山) 야구장이 있던 곳

당시 일본인 梅野淸가 타이완 동부지역에 철도 공정과 화롄항 개발 공정, 그리고 임해도로 건설 등의 3대 대 공정을 위하여 화롄 지역에 도착하여, 당시 화롄 지역 청장이던 일본인 江口良郞과 더불어 그 지역 원주민들의 모반이나 난동을 염려하여 그들에게 기초적인 학습과 장기적으로 원활한 치안 유지 등을 위하여 학교를 세운 것이 '화롄항 농업보습학교(花蓮港 農業 補習學校)'인데 우선적으로 먼저 가오샤야구단의 선수들을 편입시켜 능가오산(能高山)이라는 이름으로 1923년 정식으로 야구단을 창단한 것이 '능가오퇀(能高團)'이고, 이 팀이 타이완야구의 역사상 아주 중요한 팀 중의 하나가 됩니다.  



                       <화련항[화롄깡지에(花蓮港街)] 1933년도 모습>


전후(戰後)시기의 타이완 야구(1945~1960년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으로 타이완이 광복되고 부터 1960년대의 사이에 야구는 우선 매우 어려웠던 시기였지만, 먹고 살기 힘든데 뭔 소리냐? 하던 시기가 한국에도 있었지만 종전 후의 생활상은 한국이나 타이완이나 비슷하였으나 타이완만인들에게 야구는 더 밀착되어서 종전 후의 어려운 이 시기에도 배부터 채우고나서 야구부터 본다라는 뜻으로 자주 쓰이던 말이 타이완 원주민어(민난어)까바오칸예치우(?飽看野球)',중국어는츠바오칸빵치우(吃飽看棒球: 배를 채우고 야구부터 본다)' 란 말의 뜻입니다








 <당시 창단된 여러 야구 팀들의 모습> 

이 시기에는 비교적 중요한 시합과 대회가 연속적으로 열리고 또한 전국적으로 큰 대회가 개최되곤 했습니다. 예를 들면


- 전국운동회(全國運動會)

- 성급야구대회(省運棒球賽)

- 타이베이시장배 연식야구대회(台北市市長杯軟式棒球賽)

- 타이베이시은행주최야구대회(台北市銀行公會棒球賽)

- 전국화은금상장야구대회(華銀金像奬棒球賽)

- 전국협회배(協會杯)금상장배야구대회

  (금상장이란 '어워드',혹은 '그랑프리'라고 보시면 됩니다.) 
- 국가주석(主席杯)야구대회


등 수많은 대회가 열리는 시기였고 각 지역에서 야구팀[예를 들면(석탄팀;石炭隊), (타이디엔:타이완 전력팀;台電隊),(허쿠:합동금고팀;合庫棒球隊),(탕창;설탕공장팀;糖廠棒球隊),(티에루쥐;철도국팀;鐵路局棒球隊), 타이완 담배 주류 공매국팀;台灣省酒公賣局棒球隊), (따량팀;大凉隊), (티엔샹웨이바오팀;天香味寶隊), 삼군(육해공)야구단(三軍棒球隊)] 등이 창단 되었고 그 열기 또한 전국에 우후죽순처럼 퍼져나갔고 성원이 대단했던 시기였습니다.



                  <성급 운동회(한국으로 치면 전국체전 성격)의 야구 대회 모습> 



<성급운동회 야구장 입장권의 모습> 

이렇듯 이 시기에는 각종 공적으로나 민간쪽으로나 각종 야구 관련 사업등이 활발하게 같이 이루어지던 시기였습니다. 공적으로는 야구장을 건설하여 인프라를 구축하는 등의 사업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아마추어 야구로서의 여가 활동을 시작한 것이 이 시 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좁은 국토와 척박한 땅에서 국민적인 오락을 가져다 준 것이 바로 야구이고, 상대적으로 다른 운동에 비해서 국제적인 성과로 많이 올릴 수 있는 지금의 타이완 야구의 중시조같은 시절이었습니다. 이 때 생긴 많은 팀들이 꾸준하게 이어져 내려오면서 70년대의 타이완 야구가 국제적으로 위용을 과시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는 것이지요.


당시 한국은 축구가 최고의 인기였었고 야구는 아직 축구에 비해서는 미미하던 시기였지만 타이완은 철저하게도 일본의 속
이 되어버린 느낌이 많이 듭니다. 여러 가지 정신적으로도 점령국 일본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나라입니다. 지금도 타이완에 가면 당시의 어르신들 중에는 그 향수를 못잊는 분들이 많습니다.(직접 인터뷰도 하고 여러 가지 이전의 일본 점령 시절에 대해서도 물어본 결과로 판단했습니다.) 


아마도 한국보다 한참 오래인 반세기라는 점령 기간동안 일본의 세뇌화가 그만큼 더 깊이 파고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철저하게 일본화되었기 때문에 한국보다 좀 더 빨리 야구가 민간으로 착화되고 밀착된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 2부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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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타이완 야구에 대한 전문블로그입니다. 점차 발전하는 중화권 야구에 대한 정보를 모아 지피지기하는 마음으로 만들었습니다. 아무튼 많이 사랑해 주시면 좋겠네요.

타이완 야구 100년사를 돌아보며.....


 국제대회에서 만나면 늘 한국과 끝장 승부를 펼치며 격전을 치르는 타이완 야구에 대해서 그저 우린 한국보다 약체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타이완 야구에 관해서 제대로 된 정보도 없고 막연하게나마 그저 약하지 않나? 라는 느낌만을 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국인 선교사에게서 야구를 전수받았고, 타이완은 일본인으로부터 야구를 배웠습니다. 

 그 차이가 별로 없을 것 같지만, 현재 타이완의 야구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어느 정도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한국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타이완 야구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그저 떠도는 풍문이나 낭설, 또는 근거 없는 소리가 난무한 현상이 많기에 10부작 기획 시리즈로 타이완의 야구역사와 그 발전사를 소개합니다. 

 각종 내용의 참조와 관련 사진 및 영상 자료는 타이완의 야후와 구글, 그리고 타이완야구 위키백과, 그리고 타이완 야구 100년사 동영상 등 여러 자료를 참조하였습니다.


타이완의 야구가 시작된 것은 일제 강점기였습니다
. 당시 일본은 미국 야구의 영향을 깊게 받아들일 때
였는데 '
타이완야구100년사'의 저자인 씨에쓰위엔과 씨에지아펀(謝仕淵, 謝佳芬)의 고증에 따르면 1876미국 유학에서 돌아 온 히로시 히라오카(平岡熙)가 일본 야구의 첫 삽을 뜬 장본인이었죠. 일본이 야구를 시작한 것은 1876년이지만 1895년에 교육자인 가나에(中馬庚)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야구(野球)라는 용어를 만들어 베이스볼을 대체했습니다. 그 때가 일본 야구의 원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공교롭게도 때가 일본이 타이완을 점령한 첫 해입니다. 야구는 그렇게 일본인의 영향으로 타이완에 처음 도입되게 된 것입니다.


히로시 히라오카(平岡熙)              가나에(中馬庚) 


타이베이(台北)는 당시 일본이 대만을 통치하던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이었고, 그런 연유로 수도인 타이베이가 타이완 야구의 발원지가 됩니다. 1906 3월 대만에 처음으로 정식 야구단이 발족이 되는데 바로 타이완 총독부 야구단 입니다. 그것은 타이완 총독부 어학교 중학부(오늘날의 타이베이 건국중학교) 교장 타나까 케이이치(田中敬一)의 주도하에 성립이 됩니다


얼마안가 국어학교 사범부(오늘의 타이베이사범학원)에 또 하나의 팀이 창단되면서 그 해 봄 두 팀이 처음으로 시합을 가지게 됩니다. 그 경기는 무승부로 끝났는데요, 이 게임이 타이완 역사상 정식으로 기록된 첫 경기가 됩니다. 얼마 후 성연학교(오늘의 성연중학교)과 타이베이 공업학교, 타이베이 상업학교에 연달아 팀이 만들어 지면서 점점 타이베이대만야구의 요충지가 됩니다. 그 후 타이완 야구의 궤적은 북에서 남으로 확대되고, 다시 중부와 마지막으로 동부로 퍼져나가게 됩니다.



                                              타이베이 건국중학교의 현재모습 



                 현재의 성연중학 모습                            대만국립사범대의 모습


야구잡지인 '타이완야구왕(臺灣棒球王)'의 저자인 쯩원청(曾文誠)과 위진웨이(盂峻瑋)에 따르면 1914년 일본 와세다 대학의 명장인 이세(伊勢田剛)감독이 타이완으로 부임 해 오게되면서 타이완의 북부 야구협회가 만들어지고, 회칙이 만들어졌는데 이 회칙이 타이완에서의 첫 야구회칙이 됩니다. 또한 각종 직책들과 야구장 및 경기 규칙 등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게 되고 협회도 정식으로 발족하게 됩니다. 


그 후에 이세 감독은 타이베이와 지롱(基隆)에 야구를 확산시켰을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야구 선수들과 팀도 많이 초정을 하여 와세다 대학 야구부와 법정대학 야구부, 그리고 미국의 프로야구 선수들까지도 초청을 하여 친선 게임을 펼치고 야구에 대한 국민적인 관심을 불러모으는 등의 타이완 야구에 있어서 이세 감독의 공은 정말로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쯩원청(曾文誠), 위진웨이(盂峻瑋)공저 '타이완빵치우왕' 


지아농(嘉農)의 존엄 지아이(嘉義)야구단의 성세(盛勢)


1928년 
타이완야구 역사상 최고의 지위를 부여받은 하나의 강팀이 탄생을 합니다. 그 이름은 바로 '지아이농림야구단(嘉義農林棒球隊)입니다. 이 야구단은 타이완 공립 지아이 농림학교(台灣公立嘉義農林學; 약칭 지아농,현재 국립 지아이 대학의 전신)에서 만든 것입니다

1931년 이 팀이 일본 갑자원의 명장 효타로 콘도(近藤兵太郞)지도 하에 당시 타이완의 챔피온기는 쪼우수이시(濁水溪)를 넘어가지 않는다’***라는 전통을 깨뜨리고 타이완 대표권을 따낸 후 일본 갑자원 대회에 타이완 대표팀으로 참가하게 됩니다. 1931년 외에 1933, 35년 봄, 36년 봄, 가을까지 총 5회에 걸쳐 갑자원 대회에 참가하게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향후 대만 야구 역사상 가장 중요했던 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타이완의 챔피온 기는 쪼우수이시(濁水溪)를 넘어가지 않는다’라는 전통의 뜻은 이렇습니다. 타이완에서 가장 긴 하천(강 이라고 해야겠지요.)이 '濁水溪'입니다. 위치는 타이완 중부에 있으며 그 이름은 일본인이 지었다고 합니다. 일본 점령 시 '공업 일본 농업 타이완'이라고 주 타이완 총독부가 통치정책으로 내세웠는데 타이완 북부가 위에서 밝혔듯이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였습니다. 


위에서 말한 지아이 야구단이 타이난(타이완 남부)에 위치했는데 타이완 챔피온기는 항상 북부에서 차지하곤 했었는데, 처음으로 지아이가 우승함으로서 우승기가 남쪽으로 건너가는 바람에 그 전통이 깨지게 되어서 그런 말이 나온 것입니다.



지아이농림학교야구단



갑자원 출전후 타이완 귀향모습




    효타로 콘도(近藤兵太郞)                     타이중(台中)진롱소년야구단(金龍少棒隊)  


지아농은 당시 타이완의 팀들 사이에서 우뚝 선 절대강자이자 최고의 봉우리였고, '지아이' 라는 이름은 타이완 야구의 초석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지아농 창단 사십 여 년 후 1969년에서야 처음으로 '윌리엄스 포터(威廉波特)'배 리틀야구 대회의 챔피온이 된 타이중(台中) 진롱소년야구단(金龍少棒隊)이 그 위명을 이어받기까지 몇 년 동안 지아이는 그 위력을 타이완 사해에 떨쳤지만 진롱 야구단이 '윌리엄스 포터배'(1969) 세계 리틀 야구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획득하게 되면서 새로이 모든 명성과 위력을 가져가게 되고 지아이 야구단은 그 후로 계속 침체기에 빠져들게 됩니다.



1969년 진롱리틀야구단의 월리엄포터배 세계리틀야구선수권 우승축하 퍼레이드 모습 



윌리엄 포터의 메모리얼 파크(리틀야구의 성지) 



1977년 출전 당시의 타이완 리틀야구 대표팀의 깃발  

                                                                        - 1부 끝 -

타이완 야구에 대한 시리즈물의 첫 발을 이렇게 내디디면서 앞으로 얼마나 많은 자료를 찾고 계속해서 글을 수정해야 할 지 눈 앞이 캄캄합니다. 전체 시리즈는 총 10회로 기획하였으나 실제로 얼마가 될지는 써 봐야 알겠네요. 이 글은 부정기적인 연재로 제가 시간이 날 때 틈틈이 적어가려고 합니다만 뭐 그렇다고 몇 달에 한 편씩은 아니니까 너무 걱정은 마시고 조금 어설프더라도 재미있게 봐주시면 감사하겠네요. ^^ 

* 이 글은 예전에 다음 블로그에서 먼저 올린 글입니다만 다음 블로그를 정리하고 티스토리로 옮겨와서 다시 블로그 뉴스에 올린 글입니다. 예전에 먼저 이 글을 보신 분들께는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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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타이완 야구에 대한 전문블로그입니다. 점차 발전하는 중화권 야구에 대한 정보를 모아 지피지기하는 마음으로 만들었습니다. 아무튼 많이 사랑해 주시면 좋겠네요.

안녕하세요. 대치동갈매기입니다. 이번에는 대만에 프로 야구가 생긴 이후에 탄생했다가 사라진 팀들에 대해서 조망을 해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리그인 T.M.L(Taiwan Major League)과 C.P.B.L(Chinese Professional Baseball League)이 통합되기 전부터 생긴 팀에서 통합되고 난 후에 생겼다가 사라진 팀 순서입니다. 팀 소개에 대한 순서는 시간 순으로 하겠습니다. 

먼저 TML팀 위주로 소개합니다. TML太陽, TML金剛, TML勇士, TML雷公 팀입니다. 두 번째에서는 三商虎, 味全龍, 和信鯨, 俊國熊, 時報鷹까지 소개 해 드리고 마지막에 第一金剛, 那魯灣太陽隊, 誠泰太陽, 誠泰COBRAS 그리고 米迪亞暴龍맨 마지막으로 사라진 中信鯨 팀에 대한 소개를 하겠습니다. 먼저 타이완 야구 100년사를 하는 도중에 조금씩 조금씩 소개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현재 기획 시리즈로 쓰고 있는 시리즈가 여러 편이라서 저도 정리를 좀 해야할 것 같습니다. 

사라진 타이완 프로야구 팀들 이름

CPBL  一軍   三商虎隊|味全龍隊|時報鷹隊|俊國熊隊|興農熊隊|第一金剛隊|
                    那魯灣太陽隊|誠泰太陽隊|誠泰Cobras隊|米迪亞暴龍隊|中信鯨隊 

CPBL  二軍   代訓紅隊|中信二軍|代訓藍隊

T.M.L  一軍   聲寶太陽隊|台北太陽隊|台中金剛隊|嘉南勇士隊|高屏雷公隊



TML勇士 팀(각주를 보시면 자세한 정보가 있습니다.)

팀 마스코트 '루카(LUKA)'

지아난 용스(嘉南 勇士:지아난 브레이브스)팀은 'LUKA'라고도 불리웠습니다. 이 '루카'의 뜻은 *[각주:1]타이아(泰雅族)족의 언어로 용사의 뜻이지요. 타이난 제 3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하였고, 이 팀이 나루완(那魯灣)의 초창기 시절에 니엔다이 방송국이 만든 팀인 니엔다이 용스팀(年代勇士隊)이었습니다. 
 
원 스폰서 기업은 나루완 주식회사입니다. 1996년 12월 1일에 창단되었고 주 사용 홈구장은 지아이현립 야구장(嘉義縣立棒球場)지아이시립야구장(嘉義市棒球場),그리고 타이난시립야구장(台南市立棒球場)이었습니다.

이 팀의 스타 선수로는 [각주:2]천이신(陳義信), [각주:3]우푸롄(吳復連)등의 국내파와 Luis Iglesias(鷹俠), Sil Campusano(坎沙諾) 등의 외국 용병이 있었습니다. 나루완 4년시절 위엔촨그룹의 동의를 얻어 용스 팀(그 전에는 띠엔공/雷公)으로 개명을 하였고, 이름을 다시 위엔촨 용스 팀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 리그에서 성적이 아주 좋지않아서 나이스 그룹(耐斯集團)과 아이즈웨이(愛之味公司) 회사의 스폰서를 받아 다시 이름을 왕커 용스(網客勇士) 팀으로 바꿨습니다.

그 후에도 다음 해에 성적이 좋지 않자 그룹에서 스폰서를 철회하였고, 결국 나루완 6년에 아무런 스폰서 없이 경기를 나서야 했지요. 그래서 다시 이름을 지아난 용스 팀으로 개명을 하였습니다.
 
 
 
                                       (중문과 영문 팀 로고입니다.)

2003년 TML과 CPBL이 통합을 할 때 진강(金剛隊) 팀과 용스 팀(勇士隊)이 합병을 하여 타이양팀(太陽隊) 이름을 달고 나루완 타이양 팀으로 새 출발을 하였습니다. 2003년 3월14일에 청타이 은행의 스폰서를 유치하여 팀 이름을 청타이 타이양 팀(誠泰太陽隊)으로 개명을 하였고, 2003년 12월 12일에 정식으로 팀을 청타이 은행에 넘기면서 청타이 은행 산하의 독립 팀으로 새출발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2004년 다시 팀 이름을 정식으로 청타이(誠泰) 코브라스로 바꾸었습니다. 이 팀이 2008년 미디어그룹에 팔리게되면서 미디어 티렉스(米迪亞暴龍隊)로 바뀌게 되었죠. 그리고 미디어 티렉스는 리그에서 조직적인 승부조작과 불법 도박 혐의로 리그에서 팀을 퇴출시키는 아픔과 함께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복잡하지만 한 번 정리하자면 1997년 지아난 니엔다이 용스(嘉南年代勇士)부터 시작하여 2000년 지아난 위엔촨 용스(嘉南遠傳勇士), 그리고 2001년 지아난 왕커 용스(嘉南網客勇士)로 바뀌었고, 또 2002년에 지아난 용스(嘉南勇士)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2003년 진깡과 합병되어 나루완 타이양으로, 다시 2003년에 청타이 타이양(誠泰太陽隊), 2004년에 청타이 코브라스(誠泰 Cobras)로 바뀌었고, 최종 미디어 티렉스(米迪亞暴龍隊)로 그 역사의 끝을 장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용스(TML 브레이브스) 팀 주요기록
    1997년 최다실점 107점 사상 유일한 기록
    2001년 리그최다 패 47패
                 리그 최저 승률 0.217
                 리그 연속경기 패 16패
                 리그 팀 연속 승리 6연승 기록(당시기록)

특이한 기록 

   2002년 9월 18일에 한 경기에서 두 명의 선수가 한 투수에게 만루홈런을 때린 기록이 있습니다.

수비기록

  1998년 9월 27일 한게임 한 팀 최다 병살타 5회기록과 한 게임(두 팀 합계) 최다 병살 기록 7회

연도별 챔피언 전적 

  1997년 원년 단일리그 챔피언의 기록이 한 번 있습니다.
 
  1. 타이완 중앙산맥 부근에 사는 민족으로 대략 8만 여명이 있다. 이 민족을 부르는 용어인 'Atayal'은 원어로 뜻은 '진짜 사람' 혹은 '용감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본문으로]
  2. 일본 쥬니치에서 뛰던 타이완 투수로 CPBL 슝디 팀에서 뛰다가 TML 용스 팀으로 이적하였습니다. 생애 87번의 완투 기록(그 중 완봉 15회)하여 기록을 가지고 있는 선수입니다. [본문으로]
  3. 슝디 팀에서 뛰다가 역시 TML용스로 이적한 내야수로 '빅헤드'와 '야구계의 개구쟁이'라는 별명을 가진 내야수입니다. 현재 라뉴 베어즈의 수석코치로 재임하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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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대치동갈매기입니다. 이번에는 대만에 프로 야구가 생긴 이후에 탄생했다가 사라진 팀들에 대해서 조망을 해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리그인 T.M.L(Taiwan Major League)과 C.P.B.L(Chinese Professional Baseball League)이 통합되기 전부터 생긴 팀에서 통합되고 난 후에 생겼다가 사라진 팀 순서입니다. 팀 소개에 대한 순서는 시간 순으로 하겠습니다. 

먼저 TML팀 위주로 소개합니다. TML太陽, TML金剛, TML勇士, TML雷公 팀입니다. 두 번째에서는 三商虎, 味全龍, 和信鯨, 俊國熊, 時報鷹까지 소개 해 드리고 마지막에 第一金剛, 那魯灣太陽隊, 誠泰太陽, 誠泰COBRAS 그리고 米迪亞暴龍 맨 마지막으로 사라진 中信鯨 팀에 대한 소개를 하겠습니다.먼저 타이완 야구 100년사를 하는 도중에 조금씩 조금씩 소개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현재 기획 시리즈로 쓰고 있는 시리즈가 여러 편이라서 저도 정리를 좀 해야할 것 같습니다.


사라진 타이완 프로야구 팀들 이름

CPBL  一軍   三商虎隊|味全龍隊|時報鷹隊|俊國熊隊|興農熊隊|第一金剛隊|
                    那魯灣太陽隊|誠泰太陽隊|誠泰Cobras隊|米迪亞暴龍隊|中信鯨隊 

CPBL  二軍   代訓紅隊|中信二軍|代訓藍隊

T.M.L  一軍   聲寶太陽隊|台北太陽隊|台中金剛隊|嘉南勇士隊|高屏雷公隊

타이중 진깡(台中金剛隊) 팀의 또 다른 명칭은 'AGAN'입니다. 뜻은 타이완 원주민 어로 금강(金剛)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요. 타이중(台中)을 본거지로 태어났으며 타이중야구장(台中棒球場)신주야구장(新竹棒球場) 홈구장으로 사용했습니다. 이 팀은 타이완 야구 역사상 가장 우여곡절이 많은 팀입니다. 나루완(那魯灣)나루완이란?*의 역사에서 우승과 꼴지를 다 해본 팀이죠. 아무튼 나루완 원년에 그들의 진용은 비록 리안시(李安熙)와 순샤오리(孫昭立), 탕밍빈(康明杉) 등의 좋은 선수들이 있었지만 외국용병과 스폰서의 지원이 없이 최하위를 기록하였고, 다음 해에는 겨우 스폰서를 중국섬유회사(中國纖維公司)에서 해주기는 하였으나 성적은 또 다시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습니다.

 

마스코트

 

중문TEXT

 

영문TEXT


그 후에 쉬밍지에(許銘傑)와 씨에지아시옌(謝佳賢) 등이 가입하면서 전력이 강화되었고, 화장품과 각종 여성용품 판매회사였던 옌덩펑 그룹(媚登峰集團:Matinform Group)의 스폰서도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나루완 3년 째에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야말로 신분이 급상승한 것이지요. 그러나 호사마다라고 했던가요? 쉬밍지에가 일본으로 가버리면서 진깡 팀은 4년 째에 다시 꼴찌로 급전직하합니다.

나루완 5년 째에 나루완 회사는 대대적으로 팀을 개편합니다. 현재 라뉴 베어즈 팀의 수석코치인 우푸리옌(吳復連)을 총감독으로 임명하였고, 당시 팀의 투수들을 대부분 방출하고 새로이 신인인 황신즈(黃欽智), 리밍진(李明進) 등을 선발하였고, 스폰서도 홍치(宏碁:지금의 컴퓨터 종합그룹으로  유명한 타이완의 Acer회사)그룹으로 따내면서 전력을 강화시켜 두 번째로 챔피언의 왕좌에 오르게되었습니다. 게다가 모두 세 번을 우승하여 리그 6년 사상 세 번의 우승으로 최다우승 팀이 되었습니다.

2003년에 들어 타이완메이저연맹(TML)과 중화직봉연맹(CPBL)이 병합(C.P.B.L)된 후, 진깡 팀(金剛隊/금강)은 용스 팀(勇士隊/용사)과 합병이 되어 새로이 나루완 타이양 팀(那魯灣 太陽隊/태양)으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투수 천즈청(陳志誠) AGAN 유니폼/사진 聯合新聞


2003년 3월 14일에 스폰서 계약(청타이 은행/誠泰銀行)을 체결하고, 다시 팀 이름을 청타이 타이양(誠泰太陽)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리그 말에 다시 팀을 청타이 은행에 팔아넘김으로서 정식으로 청타이 소속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팀이 독립되어 경영을 독자적으로 하면서 2004년에 정식으로
청타이 코브라스(誠泰Cobras) 팀으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4년 후인 2008년에 미디어 그룹에 팀을 넘김으로서 다시 팀 이름은 미디어 T-Rex 팀으로 바뀌는 역사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엄청난 변화를 거친 팀으로 결국 도박에 연루된 폭력집단의 승부조작 사건으로 미디어 팀이 해체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팀 명칭 변경순으로 정리하였습니다.

TML 원년(1997년) 타이중 진깡(台中金剛)
TML 2 년(1998년) 타이중 중즈 진깡(台中中纖金剛)
TML 3 년(1999년) 타이중 진깡(台中金剛)
TML 4 년(2000년) 타이중 옌덩펑 진깡(台中媚登峰金剛)
TML 6 년(2002년) 타이중 홍치 진깡(台中媚登峰金剛)
2003년 나루완 타이양 (那魯灣太陽隊)
2004년 3월 청타이 타이양 (誠泰太陽)
2004년 12월 청타이 코브라스(誠泰Cobras)
2008년 미디어 T-Rex(米迪亞暴龍隊)

팀의 각종 기록

(1997년) 년도 최저득점 : 84득점
(2001년) 년도 최고 승률 0.729(43승16패1무)

연도별 챔피언 기록

1999년, 2001년, 2002년에 챔피온의 왕좌에 올랐습니다.
2001년과 2002년에는 리그 1위를 차지하여 결국 챔피언좌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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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치동갈매기

중국과 타이완 야구에 대한 전문블로그입니다. 점차 발전하는 중화권 야구에 대한 정보를 모아 지피지기하는 마음으로 만들었습니다. 아무튼 많이 사랑해 주시면 좋겠네요.


안녕하세요. 대치동갈매기입니다. 이번에는 대만에 프로 야구가 생긴 이후에 탄생했다가 사라진 팀들에 대해서 조망을 해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리그인 T.M.L(Taiwan Major League)과 C.P.B.L(Chinese Professional Baseball League)이 통합되기 전부터 생긴 팀에서 통합되고 난 후에 생겼다가 사라진 팀 순서입니다. 팀 소개에 대한 순서는 시간 순으로 하겠습니다.

먼저 TML팀 위주로 소개합니다. TML太陽, TML金剛, TML勇士, TML雷公 팀입니다. 두 번째에서는 三商虎, 味全龍, 和信鯨, 俊國熊, 時報鷹까지 소개 해 드리고 마지막에 第一金剛, 那魯灣太陽隊, 誠泰太陽, 誠泰COBRAS 그리고 米迪亞暴龍 맨 마지막으로 사라진 中信鯨 팀에 대한 소개를 하겠습니다.먼저 타이완 야구 100년사를 하는 도중에 조금씩 조금씩 소개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현재 기획 시리즈가 여러 편이라서 저도 정리를 좀 해야할 것 같습니다.


 

                                          <[中華職棒1]이라는 컴퓨터 게임 영상입니다.>

대책없이 벌려만 놓고 마무리를 짓지 못한 편이 여러 개라서 정신 없네요. 지금은 제 블로그가 보는 사람이 많이 없지만 계속해서 꾸준히 대만과 중국야구에 대해서 소개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나중에,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이 되면 여기에 담긴 여러 정보들이 분명 빛을 보리라고 생각됩니다. 아직까지 한국에서는 대만과 중국야구에 대해서 정확히 모르기도 하고 관심도 별로없기에 그렇지만 중국이나 대만이 더 성장하고 한국과도 교류가 잦아진다면 분명 이 블로그의 쓰임은 커지리라 생각합니다. 조그만 관심이라도 좋습니다. 지켜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루완(那魯灣) 패밀리/캐릭터


팀 소개 순서

TML太陽(台北太陽隊) + TML金剛(台中金剛隊) + TML勇士(嘉南勇士隊) + TML雷公(高屏雷公隊)

三商虎 + 味全龍 + 和信鯨 + 俊國熊 + 時報鷹

第一金剛 + 那魯灣太陽隊 + 誠泰太陽

誠泰COBRAS + 米迪亞暴龍 + 中信鯨

*** 지금 한창
WBC가 가까워졌기 때문에 이것과 관련된 글을 쓸 시간이 없네요.^^ 대회가 지나가고 대만이 탈락하면 좀 시간이 남을테니 그 때 정리해서 올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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