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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야구 이야기/대만야구 100년사

[시리즈] 타이완 야구 100년의 역사 - 제5편 -

 국제대회에서 만나면 늘 한국과 끝장 승부를 펼치며 격전을 치르는 타이완 야구에 대해서 그저 우린 한국보다 약체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타이완 야구에 관해서 제대로 된 정보도 없고 막연하게나마 그저 약하지 않나? 라는 느낌만을 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국인 선교사에게서 야구를 전수받았고, 타이완은 일본인으로부터 야구를 배웠습니다. 

 그 차이가 별로 없을 것 같지만, 현재 타이완의 야구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어느 정도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한국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타이완 야구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그저 떠도는 풍문이나 낭설, 또는 근거 없는 소리가 난무한 현상이 많기에 10부작 기획 시리즈로 타이완의 야구역사와 그 발전사를 소개합니다. 

 각종 내용의 참조와 관련 사진 및 영상 자료는 타이완의 야후와 구글, 그리고 타이완야구 위키백과, 그리고 타이완 야구 100년사 동영상 등 여러 자료를 참조하였습니다.


 프로야구의 태동(1990년대 이후)


(타이완 프로야구 원년인 1990년에 열린 올스타전 영상입니다.)


1980년대 이후 타이완 야구 세계화의 주요 근원이 되었던 3급 야구가 급격히 퇴보하게 되면서 성인야구 또한 세계의 무대에서 밀려났습니다. 지금와서 되돌아보면 야구 선수로서의 진로 문제나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가 대두되었던 시기입니다. 여러 실업 팀들이 있었지만 그다지 큰 매력으로 자리 잡지는 못하였고, 리틀야구나 청소년 야구가 국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많은 학생들이 야구 선수로의 꿈을 키운 후 생겨난 많은 팀들 또한 나중에는 발전에 정체가 되는 원인이 되었기도 합니다. 문제는 학생 시절이 끝나면 실업 리그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전국체전격의 대회에서 입장하는 야구팀/출처미상



국제 대회에서 대표 팀은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나 국내 갑조(甲組) 야구리그는 항상 관중석이 텅 비어있는 상태로 진행(당시 실업야구는 입장료를 받았습니다만 팀 운영비로 충당되어야 할 입장료 수익이 거의 없으니 해당 구단이 경영 난에 빠지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습니다.)되어야 했고, 이에 선수들도 자국의 야구보다는 좀 더 많은 수익을 보장하는 일본 쪽으로 눈을 돌리게 되면서 유망주의 해외 유출이 심해지고, 점점 타이완 사람들의 야구에 대한 애정도 식어가면서 성인 야구계는 점점 암흑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이 때에 위기를 타개하고 야구에 대한 애정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이가 바로 슝디(兄弟)호텔 그룹의 회장인 홍텅셩(洪騰勝)씨였습니다. 아마추어 야구시장의 침체는 프로화로 풀어야 한다는 의지를 가지고 주도적으로 프로 리그 창설에 나서면서 적극적으로 정부와 사회에 야구의 프로화를 요구합니다.



슝디호텔그룹의 현재모습



프로야구의 탄생/ 타이완 프로야구 연맹의 성립

1987년 12월31일에 프로야구 태동 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당시 야구협회 이사장인 탕판판(唐盼盼)씨가 겸직을 하여 主위원을 맡았습니다. 그로부터 반 년 후에 위원회는 규약을 완성하고 타이완 프로야구의 발전 방향을 잡아 나갔습니다. 프로야구 희망 기업을 선정하여 준비 작업을 시작하고, 야구규장과 규약을 보충 및 확정하였고, 구장에 대한 선정과 보충, 보완 등의 작업과 심판에 대한 육성과 심판 제도에 대한 규정을 제정하고 본격적인 프로화 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1989년 10월 23일에 드디어 중화 프로야구 연맹이 정식으로 출범하게 됩니다. 참가 팀은 웨이취엔(味全), 통이(統一), 싼상(三商), 슝디(兄弟) 등의 네 개의 기업이 프로구단을 창설하면서 타이완 역사상 최초의 프로 야구팀으로 기록됩니다.


1990년 3월 17일에 드디어 역사적인 타이완 프로야구 첫 시즌의 첫 게임이 시작되었습니다. 웨이취엔 드레곤즈와 통이 라이온즈, 싼상 타이거즈와 슝디 엘리펀츠로 각각 팀명을 정하고 리그를 시작했습니다. 이로서 아시아권에서 일본과 한국에 이어서 세 번째로 프로야구를 시작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역사적인 타이완 프로야구의 개막 경기는 타이베이 시립야구장에서 열렸습니다.


슝디 엘리펀츠와 통이 라이온즈와의 경기로 이후 이 두 팀은 타이완에서도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서의 자리매김을 하게됩니다. 아무튼 첫 경기의 결과는 통이 라이온즈가 슝디 엘리펀츠를 물리치고 역사적인 첫 승을 기록한 팀으로 영원히 남게 되었습니다. 


당시 첫 승을 올린 통이 라이온즈의 두푸밍(杜福明) 투수가 첫 승의 기록을 남기게 되었구요, 당일 또 다른 경기장에서 벌어진 싼상 타이거즈의 투수 투홍친(涂鴻欽) 선수가 웨이취엔 드레곤즈를 상대로 첫 완봉승을 기록한 선수로 남게되었습니다.


통이Vs웨이취엔 프로원년 입장권/사진출처 Mirage-2000's Secret Base

통이Vs슝디 프로원년 입장권/사진출처 Mirage-2000's Secret Base



타이완 프로야구의 성장/프로야구의 열기가 높아지다



1990년 타이완에 프로야구가 처음으로 시작된 지 몇 년 후. 타이완의 야구계는 대폭적인 성장을 하였습니다. 먼저 야구 선수에 대한 처우가 실업 리그에 있을 때보다 훨씬 많이 개선되었습니다. 그 전 아마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생활할 수 있을 정도의 수입이 보장되었고, 각종 광고나 스폰서로 인해서 월급 외의 수입도 생겨났고, 프로화로 각종 방송 노출도 되어 자연스럽게 선수들의 사회적 지위도 같이 상승되었습니다.


실력이 뛰어난 선수들이 자연스럽게 유명세를 타고 우상화되면서 스타를 좋아하는 팬층이 자연스럽게 같이 생겨났고, 어린이들에게 꿈을 주는 스포츠가 되면서 야구를 즐기는 어린이들이 많아지는 등의 야구의 저변도 확대가 되었습니다.


올해로 20주년을 맞은 타이완의 프로야구 CPBL 홈페이지 모습 /http://www.cpbl.com.tw


1990년부터 1997년까지 프로야구 누적관중 수가 1,000만 명(타이완 全 섬의 인구가 2,300만 명)을 돌파하게 되면서 정부에서도 야구의 프로화에 따른 효과를 점차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타이완 총통과 행정원장 및 각계 대표들이 야구장을 찾아 협력을 위한 단결을 하여 타이완의 정치적인 염원인 국제대회 유치를 위한 돔 구장 건설(참고자료)을 결정하여 현재 건설 중에 있습니다. 


또한, 각 지방 정부와도 합작을 하여 노화된 야구장의 보수 및 신축 등을 결정하여 프로화가 시작된 1990년에 겨우 다섯 개 밖에 없던 야구장이 현재는 프로야구 경기를 할 수 있는 야구장이 모두 17개 구장으로 늘어났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절대적으로 정부의 큰 도움이 있었던 시기입니다. 

타이완의 야구장 자료 연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