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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야구 이야기/대만야구 100년사

[시리즈] 타이완 야구 100년의 역사 - 제7편 -

 
국제대회에서 만나면 늘 한국과 끝장 승부를 펼치며 격전을 치르는 타이완 야구에 대해서 그저 우린 한국보다 약체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타이완 야구에 관해서 제대로 된 정보도 없고 막연하게나마 그저 약하지 않나? 라는 느낌만을 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국인 선교사에게서 야구를 전수받았고, 타이완은 일본인으로부터 야구를 배웠습니다. 

 그 차이가 별로 없을 것 같지만, 현재 타이완의 야구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어느 정도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한국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타이완 야구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그저 떠도는 풍문이나 낭설, 또는 근거 없는 소리가 난무한 현상이 많기에 10부작 기획 시리즈로 타이완의 야구역사와 그 발전사를 소개합니다. 

 각종 내용의 참조와 관련 사진 및 영상 자료는 타이완의 야후와 구글, 그리고 타이완야구 위키백과, 그리고 타이완 야구 100년사 동영상 등 여러 자료를 참조하였습니다.



지난 편에 이어서 계속 하겠습니다. 지난 편에서는 양대리그의 경쟁까지를 알아봤었는데 이번  편에서는 그 양대리그의 합병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CPBL&TML 양대리그 합병 기자회견/연합보 뉴스 사진

양대리그 통합 합병 협의서


타이완의 프로 야구사에서 TML(Taiwan Major League)의 성립은 야구계에 좋은 기류를 가져다 주었습니다만 비슷한 리그가 두개가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어느 한쪽은 도태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습니다. 좁은 국토에 2,300만 가까이의 인구 수로는 큰 시장을 형성할 수 없었고, 운영을 잘 못하는 한쪽은 도태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었습니다. 


관중 수나 상업적인 판매 등에서 인기가 떨어지는 쪽은 손실이 막대하여 경영이 어려워 질 수밖에 없는 시장 규모와 현실로 둘로 나뉘어진 시장을 두고 프로야구계는 많은 고민을 합니다.


2003년 1월 13일 행정원의 체육위 주관부서의 주 위원인 린더푸(林德福)가 CPBL 연맹과 TML 연맹의 대표 7인(당시 CPBL 연맹회장인 천허동(陳河東), 통이기업(統一企業)의 린창셩(林蒼生) 회장, 슝디구단(兄弟象隊)의 홍뤼허(洪瑞河) 회장, 싱농그룹(興農集團)의 양티엔파(楊天發) 회장, 중국신탁(中國信託)의 린보이(林博義) 회장, 나루완주식회사(那魯灣股份有限公司)의 천성티엔(陳盛沺) 회장, 니엔다이방송국(年代電視台)의 치우푸셩(邱復生) 회장 등)을 소집하여 합병에 대하여 논의를 하였고 결국 천수이비옌(陳水扁) 총통의 직접 입회하에 양대 리그의 수장들이 리그통합 합병협의서에 서명을 하였습니다.

합병을 알리는 신문뉴스 제목


그리고 나루완 주식회사의 동의 하에 TML을 해산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4개 구단이던 TML을 2개 구단으로 통합시켰습니다. 남은 띠이진깡(第一金剛) 팀과 타이양(太陽) 팀은 CPBL로 가입시켰습니다. 그래서 정식으로 두 연맹이 통합되고 명칭은 CPBL로 통합되었습니다.


2003년(프로야구 14년) 3월 1일에 통합리그가 정식으로 타이베이의 티엔무 야구장에서 거행되었습니다.  당시 만 여 명의 관중들로 꽉 찬 개막전은 천 총통의 시구를 시작으로 새로운 타이완의 프로야구로서의 신기원을 열었습니다.

2004년에 청타이 은행이 타이양 팀을 흡수하여 팀 명을 코브라로 개명하였습니다. 그리고 라뉴 기업이 진깡 팀을 인수하여 라뉴 베어즈로 개명하였습니다.


타이완의 프로야구 역사 연대표를 만들었습니다. 아래 첨부하는 이미지를 보시면 연대 순으로 타이완의 

프로야구 역사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큰 이미지로 보시면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올림픽 열기를 프로야구 판으로


2004년 타이완 성인야구 대표팀은 그리스 아테네 올림픽 참가자격을 위한 예선전(일본 삿뽀로에서 열린 제 22회 아시아야구선수권 대회)에서 중국을 3:1로, 그리고 그들의 가장 큰 목표였던 한국을 5:4로 이기면서 아시아 지역 2위까지 주어지는 올림픽 야구 출전권을 따내었습니다. 실로 타이완이란 나라가 들썩할만한 쾌거를 이루었다고 연일 신문과 언론에서는 난리였습니다.

이것은 타이완 야구 대표팀이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이후에 무려 12년 만에 다시 올림픽 무대를 밟게되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이 타이완에서는 승부조작 사건 등으로 몰락해버린 야구의 인기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계기를 만든 중요한 터닝 포인트였습니다. 또한 이 올림픽 출전권을 획득하면서 타이완 전역에 야구 열기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붐을 조성하게 되었습니다.


기대를 안고 출전한 아테네 올림픽에서 타이완 대표팀은 연일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당당하게 5위라는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비록 4강에는 들지 못하였습니다만 중요한 일본과의 경기에서 뼈아픈 패배지만 좋은 경기를 보여주면서 희망을 가지게 했습니다. 


이날 경기는 먼저 일본의 에이스인 우에하라 선수로부터 천진펑(陳金鋒)이 3점 홈런을 쏘아 올리며 3:0으로 이기고 있었는데, 일본의 타카하시 요시노부의 활약으로 결국에는 4:3 역전패를 당하면서 지켜보던 타이완 국민들에게 많은 안타까움을 주었습니다. 이 경기에서 미국으로 진출한 3인방(콜로라도 록키즈의 차오진후이와 LA 다저스의 천진펑, 그리고 뉴욕 양키즈의 왕지엔민)이 활약을 하면서 타이완 국민들에게 많은 자부심을 심어 주었습니다.


(차오진후이의 강속구로 159km/h를 기록한 장면.)


당시 왕지엔민이 선발로 나와 7회까지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위력을 과시하였고, 뒤를 이어 나온 차오진후이가 경기 중에 162km/h가 나왔다고 했는데, 실제 경기 영상에는 159km/h(이 선수의 평속이나 구위를 볼 때 162km/h까지는 안 나오는 투수입니다. 156km/h정도가 가장 빠른 구속이라고 알고 있는데, 당시 올림픽 중계화면에 159km/h라고 뜨기는 떴습니다만 스피드건의 조작 미스나, 또는 구장의 환경이나 바람, 고도 등의 요소로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무튼, 그 기록은 역시 정식으로 인정되지는 않았습니다.)의 강속구를 던졌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고, 역시 미국에 진출한 천진펑 선수가 우에하라에게서 통쾌한 홈런을 뽑아내면서 일약 국민적인 영웅으로 떠올랐습니다.

 
  (아테네 올림픽에서 일본 에이스 우에하라로부터 3점 홈런을 뽑아낸 천진펑 선수: 5분50초부터)


타이완야구 100년사 제 7편 종료.

다음 제 8편에서는 프로야구의 흥망성쇠(興亡盛衰) 중에 주로 망과 쇠편이 되겠습니다. 불법적인 승부 조작과 화이트 글러브 사건, 그리고 도박 세력과의 연계로 점점 수렁에 빠지는 타이완 프로야구계의 현실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2014년 1월 13일 지난 7편까지를 재편집하면서 타이완 야구 100년의 역사 시리즈가 7편까지 적은 후 한참을 손을 놓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다음 8편은 조만간 정리해서 업데이트 하겠습니다. 사실 8편의 내용이 많아서 한텀 쉬어가려고 했던 것인데, 귀차니즘이 발동되어 쭈욱 쉬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