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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야구 이야기/대만야구 100년사

[시리즈] 타이완 야구 100년의 역사 - 제1편 -

타이완 야구 100년사를 돌아보며.....


 국제대회에서 만나면 늘 한국과 끝장 승부를 펼치며 격전을 치르는 타이완 야구에 대해서 그저 우린 한국보다 약체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타이완 야구에 관해서 제대로 된 정보도 없고 막연하게나마 그저 약하지 않나? 라는 느낌만을 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국인 선교사에게서 야구를 전수받았고, 타이완은 일본인으로부터 야구를 배웠습니다. 

 그 차이가 별로 없을 것 같지만, 현재 타이완의 야구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어느 정도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한국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타이완 야구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그저 떠도는 풍문이나 낭설, 또는 근거 없는 소리가 난무한 현상이 많기에 10부작 기획 시리즈로 타이완의 야구역사와 그 발전사를 소개합니다. 

 각종 내용의 참조와 관련 사진 및 영상 자료는 타이완의 야후와 구글, 그리고 타이완야구 위키백과, 그리고 타이완 야구 100년사 동영상 등 여러 자료를 참조하였습니다.


타이완의 야구가 시작된 것은 일제 강점기였습니다
. 당시 일본은 미국 야구의 영향을 깊게 받아들일 때
였는데 '
타이완야구100년사'의 저자인 씨에쓰위엔과 씨에지아펀(謝仕淵, 謝佳芬)의 고증에 따르면 1876미국 유학에서 돌아 온 히로시 히라오카(平岡熙)가 일본 야구의 첫 삽을 뜬 장본인이었죠. 일본이 야구를 시작한 것은 1876년이지만 1895년에 교육자인 가나에(中馬庚)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야구(野球)라는 용어를 만들어 베이스볼을 대체했습니다. 그 때가 일본 야구의 원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공교롭게도 때가 일본이 타이완을 점령한 첫 해입니다. 야구는 그렇게 일본인의 영향으로 타이완에 처음 도입되게 된 것입니다.


히로시 히라오카(平岡熙)              가나에(中馬庚) 


타이베이(台北)는 당시 일본이 대만을 통치하던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이었고, 그런 연유로 수도인 타이베이가 타이완 야구의 발원지가 됩니다. 1906 3월 대만에 처음으로 정식 야구단이 발족이 되는데 바로 타이완 총독부 야구단 입니다. 그것은 타이완 총독부 어학교 중학부(오늘날의 타이베이 건국중학교) 교장 타나까 케이이치(田中敬一)의 주도하에 성립이 됩니다


얼마안가 국어학교 사범부(오늘의 타이베이사범학원)에 또 하나의 팀이 창단되면서 그 해 봄 두 팀이 처음으로 시합을 가지게 됩니다. 그 경기는 무승부로 끝났는데요, 이 게임이 타이완 역사상 정식으로 기록된 첫 경기가 됩니다. 얼마 후 성연학교(오늘의 성연중학교)과 타이베이 공업학교, 타이베이 상업학교에 연달아 팀이 만들어 지면서 점점 타이베이대만야구의 요충지가 됩니다. 그 후 타이완 야구의 궤적은 북에서 남으로 확대되고, 다시 중부와 마지막으로 동부로 퍼져나가게 됩니다.



                                              타이베이 건국중학교의 현재모습 



                 현재의 성연중학 모습                            대만국립사범대의 모습


야구잡지인 '타이완야구왕(臺灣棒球王)'의 저자인 쯩원청(曾文誠)과 위진웨이(盂峻瑋)에 따르면 1914년 일본 와세다 대학의 명장인 이세(伊勢田剛)감독이 타이완으로 부임 해 오게되면서 타이완의 북부 야구협회가 만들어지고, 회칙이 만들어졌는데 이 회칙이 타이완에서의 첫 야구회칙이 됩니다. 또한 각종 직책들과 야구장 및 경기 규칙 등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게 되고 협회도 정식으로 발족하게 됩니다. 


그 후에 이세 감독은 타이베이와 지롱(基隆)에 야구를 확산시켰을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야구 선수들과 팀도 많이 초정을 하여 와세다 대학 야구부와 법정대학 야구부, 그리고 미국의 프로야구 선수들까지도 초청을 하여 친선 게임을 펼치고 야구에 대한 국민적인 관심을 불러모으는 등의 타이완 야구에 있어서 이세 감독의 공은 정말로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쯩원청(曾文誠), 위진웨이(盂峻瑋)공저 '타이완빵치우왕' 


지아농(嘉農)의 존엄 지아이(嘉義)야구단의 성세(盛勢)


1928년 
타이완야구 역사상 최고의 지위를 부여받은 하나의 강팀이 탄생을 합니다. 그 이름은 바로 '지아이농림야구단(嘉義農林棒球隊)입니다. 이 야구단은 타이완 공립 지아이 농림학교(台灣公立嘉義農林學; 약칭 지아농,현재 국립 지아이 대학의 전신)에서 만든 것입니다

1931년 이 팀이 일본 갑자원의 명장 효타로 콘도(近藤兵太郞)지도 하에 당시 타이완의 챔피온기는 쪼우수이시(濁水溪)를 넘어가지 않는다’***라는 전통을 깨뜨리고 타이완 대표권을 따낸 후 일본 갑자원 대회에 타이완 대표팀으로 참가하게 됩니다. 1931년 외에 1933, 35년 봄, 36년 봄, 가을까지 총 5회에 걸쳐 갑자원 대회에 참가하게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향후 대만 야구 역사상 가장 중요했던 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타이완의 챔피온 기는 쪼우수이시(濁水溪)를 넘어가지 않는다’라는 전통의 뜻은 이렇습니다. 타이완에서 가장 긴 하천(강 이라고 해야겠지요.)이 '濁水溪'입니다. 위치는 타이완 중부에 있으며 그 이름은 일본인이 지었다고 합니다. 일본 점령 시 '공업 일본 농업 타이완'이라고 주 타이완 총독부가 통치정책으로 내세웠는데 타이완 북부가 위에서 밝혔듯이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였습니다. 


위에서 말한 지아이 야구단이 타이난(타이완 남부)에 위치했는데 타이완 챔피온기는 항상 북부에서 차지하곤 했었는데, 처음으로 지아이가 우승함으로서 우승기가 남쪽으로 건너가는 바람에 그 전통이 깨지게 되어서 그런 말이 나온 것입니다.



지아이농림학교야구단



갑자원 출전후 타이완 귀향모습




    효타로 콘도(近藤兵太郞)                     타이중(台中)진롱소년야구단(金龍少棒隊)  


지아농은 당시 타이완의 팀들 사이에서 우뚝 선 절대강자이자 최고의 봉우리였고, '지아이' 라는 이름은 타이완 야구의 초석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지아농 창단 사십 여 년 후 1969년에서야 처음으로 '윌리엄스 포터(威廉波特)'배 리틀야구 대회의 챔피온이 된 타이중(台中) 진롱소년야구단(金龍少棒隊)이 그 위명을 이어받기까지 몇 년 동안 지아이는 그 위력을 타이완 사해에 떨쳤지만 진롱 야구단이 '윌리엄스 포터배'(1969) 세계 리틀 야구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획득하게 되면서 새로이 모든 명성과 위력을 가져가게 되고 지아이 야구단은 그 후로 계속 침체기에 빠져들게 됩니다.



1969년 진롱리틀야구단의 월리엄포터배 세계리틀야구선수권 우승축하 퍼레이드 모습 



윌리엄 포터의 메모리얼 파크(리틀야구의 성지) 



1977년 출전 당시의 타이완 리틀야구 대표팀의 깃발  

                                                                        - 1부 끝 -

타이완 야구에 대한 시리즈물의 첫 발을 이렇게 내디디면서 앞으로 얼마나 많은 자료를 찾고 계속해서 글을 수정해야 할 지 눈 앞이 캄캄합니다. 전체 시리즈는 총 10회로 기획하였으나 실제로 얼마가 될지는 써 봐야 알겠네요. 이 글은 부정기적인 연재로 제가 시간이 날 때 틈틈이 적어가려고 합니다만 뭐 그렇다고 몇 달에 한 편씩은 아니니까 너무 걱정은 마시고 조금 어설프더라도 재미있게 봐주시면 감사하겠네요. ^^ 

* 이 글은 예전에 다음 블로그에서 먼저 올린 글입니다만 다음 블로그를 정리하고 티스토리로 옮겨와서 다시 블로그 뉴스에 올린 글입니다. 예전에 먼저 이 글을 보신 분들께는 죄송합니다.